어느덧 복싱을 꾸준히 수련한 지도 2년 6개월이 되었다. 복싱장은 샌드백, 스파링, 거친 숨소리로 가득하다. 조용할 틈이 없다. 복싱은 온몸을 사용하는 스포츠라 딴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요즘에는 복싱과 정반대로 보이는 두뇌스포츠 체스에도 푹 빠져 있다. 체스를 두다가 꾸벅꾸벅 졸았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복싱을 수련하다 보면 복싱이 단순히 본능에 의존한 신체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초 안에도 수많은 수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복싱과 체스 모두 수싸움의 스포츠다. 하나는 몸으로, 하나는 머리로. 체스에 끌렸던 게 우연은 아니었나 보다. 체스와 복싱을 번갈아가면서 대결하는 체스복싱이라는 종목도 있다던데 국내에서 열린다면 할아버지 되기 전에 꼭 참가해 봐야겠다.
생애 첫 체스대회... 온라인 체스와 달랐던 점
출퇴근하며 지하철이나 퇴근 후 집에서 쉬면서 체스를 취미로 두었다. 그런데 우연히 복싱장 건너편에서 시민체스대회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 체스 신의 부르심인가. 나에게 체스게임을 소개해준 친구에게 전달했고 우리는 경험 삼아 체스대회에 참가해 보기로 했다.
지난 7월 5일(일) 무더운 여름날 시민체스대회가 열렸다. 성북구체스연맹이 주최하고 주관하는 '제1회 성북구청장배 체스대회'였다. 체스대회가 열리는 성북구청 다목적홀에 입장했다. 책상 위에는 체스판과 체스 시계가 올려져 있고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의자가 마주 보고 있다. 진행 요원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착석했다.
시합 시간에 가까워지자 비어있던 자리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성인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보호자와 동행한 초등학생이었다. 체스 경기는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진행했다. 라운드 로빈 방식은 기력(레이팅)에 따라 그룹별로 6명씩 조가 편성되고, 참가자는 모든 그룹 구성원과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총 다섯 경기를 치르고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가 우승하는 방식이다.
나와 친구는 각각 기력 520 이하의 조에 속했다. 가장 기력이 낮은 조였다. 실제로 친구와 나는 온라인 기력이 520 이하인데 '어떻게 우리 정보를 알았을까?'라며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우리 조에는 초등학생 세 명과 성인 세 명이 편성되었다. 첫 경기 상대는 성인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악수를 건넸다. 서로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매번 휴대폰으로 온라인 체스게임을 하다가 오프라인으로 체스시합을 하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휴대폰의 작은 화면과 커다란 체스판은 시각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기물을 직접 손으로 이동한다는 점도 달랐다. 긴장한 탓인지 첫 움직임부터 실수를 저질렀다. 평소 움직이던 위치의 폰을 움직이지 않고 다른 폰을 움직였다.
온라인 체스와 다른 점은 내가 기물을 이동한 후에는 체스시계의 버튼을 누른다는 점이다. '딸깍' 소리가 묘하게 긴장감을 조성했다. 또한 하나의 기물을 손에 대면 반드시 그 기물을 이동해야만 한다. '터치 무브'라는 규칙이다. 온라인 체스게임과 다른 점이었다. 첫 번째 경기는 운 좋게도 승리로 끝났다.
마치 영화 <승부>의 이창호가 떠오른 체스 상대
장기나 바둑에서 기풍이 있듯 체스도 스타일이 있다. 그 스타일을 보면 선수의 성격이나 성향을 가늠된다. 나는 공격적이다. 날카로운 공격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공격에 몰두하다가 방어에 실패하며 무너지기도 한다.
반면에 철저히 계산적인 스타일도 있다. 감히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얼마 전 본 영화 <승부>의 이창호 기사가 떠오르는 상대를 만났다. 이창호는 크게 전투를 해서 이기기보다는 치밀한 계산력으로 작은 집 차이일지라도 승리를 따내는 스타일이다.
나를 상대한 성인도 모험적인 공격을 하거나 도발적인 수는 두지 않았다. 1점이라도 앞설 수 있다면 안전하고 방어적인 수를 뒀다. 숨 막힐듯한 경기 운영이었다. 중반부에 이르자 상대 기물을 잡는 방식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상대 기물을 잡기보다는 시간으로 승리를 따내는 전략으로 수정했다. 속기를 두면서 상대가 고민하는 데 제한시간을 모두 사용한다면, 승리를 따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1분 여 시간이 남았을 때였다. 스테일메이트가 된 것 같아 심판을 호출했다. 체스에서 킹의 자살은 금지되어 있다. 스테일메이트는 체크 상태는 아니지만 킹을 어느 쪽으로든 이동하면 자살하게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스테일메이트는 서로의 기물이 몇 개가 남아있든 무승부로 처리된다.
"스테일 메이트 아닌가요?"
심판은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킹이 움직일 수 있는 수를 안내하며 스테일메이트가 아니라고 판정했다. 짜릿한 무승부가 되었다는 내적 기쁨은 고새 좌절감으로 급변했다. 결국 체크메이트가 되어 패배했다.
이기거나, 배우거나
체스대회는 온라인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전략을 배우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다른 상대 중 한 명은 초등학생이었다. 초시계를 눌러야 게임이 시작되는데 한참 동안 체스 초시계에 손을 올려놓고 초조해했다. "이제 시작할까?"라고 묻자 두 손을 입에 모으고서 "잠시만요.."라고 말하더니 숨을 들이키며 "긴장된다"라고 말했다.
동네 마실 나오듯 대회에 참가한 나와는 달리 긴장한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진지한 태도에 맞춰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체스를 두었다. 공방이 오가며 긴장감을 느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던 중 상대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상대는 "제가 졌습니다"라며 자신의 킹을 스스로 쓰러뜨리며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먼저 악수를 건넸다.
그는 1년 정도 체스를 배웠고 지금은 쉬고 있다고 했다. 삼촌뻘인 나에게 킹이 아닌 다른 기물의 폰을 움직이는 첫수가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체스를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체스계 야인 같은 나의 수가 독특할 수밖에...
비록 시합은 지지 않았지만 1년 동안 배운 초등학생은 나보다 실력적으로 나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궁금증을 질문했다. "그러면 보통 어떤 폰을 먼저 움직여?"라고 묻자 보통은 "킹 앞에 있는 폰을 움직여 중앙을 장악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중앙을 장악하면 나의 이동은 자유롭되 상대 이동은 제한되기 때문이다.
체스학원에서 체스를 배운 초등학생에게 체스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친구는 체스학원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했을 야성 있는 공격을 제대로 맛봤지만 말이다. 이날 전적은 4승 1패. 나를 이긴 상대는 5승이어서 우승을 했고 조 2등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체스는 나이를 불문하고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모든 경기가 끝난 후에도 번외 시합이 펼쳐졌다. 70세 이상으로 보이는 안경을 쓰신 어르신께서 한수 두자고 제안하셨고 흑과 백을 번갈아가며 두 판을 두었다. 실력 차가 꽤 났다. 시합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르신은 여러 수를 물러주셨다. 훌륭한 실력뿐만 아니라 고수가 지닌 품위도 보여주셨다. 실력차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패배라기보다 지도 같았달까. 정식 시합에서는 초등학생과, 번외 시합에서는 어르신과 체스를 두었다. 이것이 요즘 그렇게 강조하는 체스판 위 ‘세대 융합’ 아닐까.
게다가 이게 무슨 운명적 만남인가. 복싱장에서 스파링을 했던 관원도 시합장에서 만났다. 우리는 단 한 번 만났던 사이였다. 링 위에서 주먹을 나눴기 때문이었을까. 서로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고 나는 체스도 겨뤄보자고 제안했다. 깔끔하게 졌다. 하지만 복싱 스파링이 그렇듯 다양한 상대와 체스를 두며 여러 스타일을 경험해 보니 체스 실력도 한껏 상승한 느낌이었다. 이런 게 시합 출전의 장점 아닐까. 넬슨 만델라의 명언으로 요약되는 하루였다. ‘이기거나 배우거나’.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체스
누군가 나 같은 왕초보가 '체스의 묘미를 수싸움'이라고 운운하는 걸 보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체스를 즐기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승패가 있는 스포츠에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승부에 덜 연연하며 체스 자체를 즐기면 된다.
친구와 함께라면 체스를 더욱 즐길 수 있다. 여타 스포츠가 그렇듯 체스 시합은 체스판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부분이 재미 요소가 되기도 한다.
수싸움을 하면서 함정을 파고 그 함정에 속은 친구에게 웃음 짓는 이모티콘을 날려준다. 상대의 기물뿐만 아니라 심리를 흔들면 더욱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친구와 두는 체스는 체스판에서 이뤄지는 수싸움보다 채팅창에서 벌어지는 말싸움이 훨씬 재밌긴 하다. 체스는 져도 채팅창에서 이기면 되니까.
휴대폰으로 무료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면 여남노소 누구나 바로 체스를 즐길 수 있다. 친구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즐길만한 취미로 딱이지 않은가. 그러다 욕심이 나면 체스 규칙과 기술을 익히고 지난 게임을 복기하며 실력을 키워도 된다.
하지만 조심하자. 체스는 '시간 도둑'이다. 매번 마지막 한판이라고 다짐해 보지만 어느새 다시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한판을 지면 한판을 이기고 싶은 욕망, 그리고 숫자로 표기된 기력(레이팅)을 올리고 싶은 욕구가 일렁이기 때문이다. 체스판이 링처럼 느껴지고 자꾸 나는 링에 오른다. 진짜 스포츠 중독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