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세계 비건의 날
* 비건은 1944년 영국의 도널드 왓슨이 고안한 개념으로 모든 동물성 재료를 먹지 않는 신념이자 신념을 가진 이를 가리킨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는 것, 사용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때때로 나는 비건 지향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긴다. 의도치 않게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식사 자리에는 더욱 그러한다. '비건'을 향한 사회적 인식이 그리 따사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라고 밝힐 때가 있다. 육류가 포함된 메뉴로 통일해서 주문하려 하거나 인원수대로 고기를 주문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표현은 완충적 표현이자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상대가 신념인지 취향인지 알 수 없도록 말이다. 처음부터 '비건'이라는 단어를 내 입에 담는 순간 나를 향한 경계 태세가 심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건이에요?"
"그러면 달걀, 우유, 생선도 안 먹어요?"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나에게 시간차를 두고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비건을 향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질문조차 하지 않았을 테다. 질문한다는 건 그래도 마음의 장벽이 한 꺼풀 벗겨지는 걸 의미한다고 본다. 그게 호기심이든 뭐든 말이다.
마치 지갑에 넣어뒀던 명함을 꺼내듯, 술술 이야기를 풀어낸다. "비건 지향인데, 국물에 포함된 육수 같은 건 그냥 먹어요. 덩어리째로 골라낼 수 있는 건 골라내고요. 밖에서는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사골국물이나 순댓국이나 특유의 육향이 많이 나는 건 먹지 못해요." 진품명품에서 가품으로 감별되는 듯한 순간이기도 하고 비건 지향인의 쉽지 않은 현실을 토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의 유형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그런데 비건이라는 말이 익숙한가? 필자는 비건을 지향하기 전에는 비건이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 채식이라는 개념도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알았다. 우리 집 밥상에는 색깔만 달라질 뿐 늘 고기가 있었다. 고기가 음식의 전부이고 채소와 밥은 곁들임 정도였다. 나뿐만이 아니다. 이십 대 중반이 되기 전까지 주변에 채식하는 이를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내 주변은 '고기귀신'으로 가득했다.
내가 처음 만난 채식주의자는 10년 전 국제화교육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남아공 친구였다. 그게 채식주의자와 첫 만남이자 채식이라는 세계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세상에 고기가 비싸서 못 먹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서 잠깐, 비건과 채식(혹은 채식주의)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궁금한 이들이 있을 테다. 비건(vegan)은 모든 동물성 재료를 먹지 않는 신념이나 이를 실천하는 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먹는 것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 물건은 사용하지 않는다.
채식은 비건보다는 넓은 개념이고 일찍 생긴 개념이다. 본래 채식은 식물로부터 유래한 음식만을 먹는 식습관을 뜻하지만, 유제품과 계란, 꿀을 먹는 것을 채식에 포함시킨다. 심지어 닭과 같은 조류의 고기까지 먹는 '폴로 베지테리언'도 있다. 허용하는 동물성 식품에 따라 락토 베지테리언, 오보 베지테리언 등 다양한 채식의 유형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건 각종 채식주의를 일컫는 용어를 채식의 '단계'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채식의 유형이나 종류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끗 차이이지만 인식에 따라 채식을 대하는 무게가 달라지리라 믿는다.
이제는 비건이라는 말도 널리 알려진 것 같다. 가끔 육식하는 이들로부터 먼저 '비건'이라는 단어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비건을 지향한다고 말하면 대다수 반응이 유사하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놀라는 표정이다. 상상만 했던 SF소설 속 캐릭터를 마주한 느낌인 걸까. 아마도 모든 동물성 식재료를 거부한다는 데에서 오는 놀라움일 테다.
백점 비건은 없다
필자는 6년 전 채식을 시작했다. 이전에도 오랜 시간 동물과 육식에 관한 고민이 있었지만 채식을 시도해 볼 여유는 없었다. 요리에도 자신이 없었지만 음식점에서도 채식 메뉴는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맛있는 고기를 포기하고 사는 삶이 상상되지 않았다.
이 육식주의자는 동물복지 인증 육류를 사 먹는 것으로 죄책감을 씻었다. 좀 더 비싼 금액은 비윤리적인 육식을 하는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금 같은 것이었다. 동물복지 인증 육류를 사 먹는 이, 동물 윤리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주겠는가? 후하게 100점 만점에 20점 정도 쳐주자.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다니던 직장을 쉬면서 이직 준비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얼마나 지속할진 모르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시도조차 해볼 수 없겠다. 그렇게 1년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페스코 베지테리언 시기를 거쳐 비건으로 전향했다. 페스코 베지테리언은 50점 정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비건은 동물 윤리 점수로 백점을 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건이라는 말은 본래 의미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순결함을 요구한다. 비건이라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들에게는 엄격한 잣대가 들어온다. 늘어나는 배달 용기는 어떻게 할 거냐? 농업으로 인한 야생동물 피해는 어쩔 거냐? 네가 먹은 국물에 멸치육수가 들어간다!
정답 없는 시험을 치는 기분이 들었다. 백점인 줄 알았던 오만한 채식인은 육식인들의 매서운 회초리에 절로 고개를 숙인다. 때때로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채식인의 날카로운 칼날이 날 서게 다가오기도 한다. 비건 식단을 하며 느꼈던 해방감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도대체 언제쯤 비건이라는 미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채포자'가 되지 말고, 헐렁헐렁 고무줄 채식인이 되어보자
하지만 여기서 '채포자(채식 포기자)'가 되지 않았다. 어느덧 백 점짜리 비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완벽한 비건이 되려기보다는 느슨한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헐렁헐렁한 고무줄바지처럼 상황에 맞게 유연한 비건 지향인, 동물성 식품을 최대한 지양하는 플렉시테리언이 되기로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출근하는 5일 중 4일 정도는 혼밥을 하기 때문에 비건 전문음식점을 가기도 하고 집에서 요리한 비건 도시락을 먹는다. 그래서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비건 친구들만 만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논비건 친구도 전보다는 편히 만난다. 그렇다고 덩어리고기를 먹는 건 아니다. 내가 덩어리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는 친구들과 나름의 협상 과정을 통해 최적의 식당을 매번 찾아낸다.
그렇게 서로가 식탁을 조금씩 양보하면 서로의 마음이 더 잘 전해진다. 나와 함께 식사하는 이가 언젠가 비건을 시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적어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던 비건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은 사라지지 않을까.
채식이라는 세계는 객관식 시험도, 게임의 퀘스트도 아니다. 정답을 향한 길은 없다. 저마다 상황과 처지에 맞게 자신만의 채식 스타일을 만들 수 있다. 이는 식품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의류나 신발, 잡화류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새로운 비건 상품을 사기보다는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게 오히려 비인간동물을 위한 일일 수 있다.
지난 11월 1일은 세계 비건의 날이었다. 식단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비건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열렬히 응원한다. 반대로 비건이라는 엄격한 잣대에 겁먹어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이들이 있다면, 완벽함과 순결성에 대한 부담은 내려놓고 시작해 볼 것을 권한다. 일주일에 한 번만 해도 되고 저녁식사만 채식을 해도 된다. 부디 비건이라는 상상의 감옥을 만들어 갇혀있지 말자. 세상에는 다양한 채식이 있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당신이 새로운 채식 스타일과 문화를 만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