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핏하면 정전인 집에서 두 달 넘게 살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내가 살았던 지역은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450k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대도시는 아니지만 공항이 있고 인근 지역 주민들은 취업이나 학업을 위해 건너오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도시 혹은 시골로 간단히 구분할 순 없다. 한국인의 관점과는 맞지 않을 것이기에.
처음 내가 살았던 집은 그 지역에서도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왕 해외살이를 하는 것이니 서울에서 누리기 어려운 것들을 누리고자 넓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택했다. 다른 집과의 거리도 떨어져 있어서 이 집이든, 남의 집이든, 소음을 걱정할 것도 없었고 도심의 답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집에 도착한 첫날은 늦은 저녁이었다. 가로등이 없어 길은 무척 어두웠고 주변 집들도 불 켜진 곳이 없어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집도 어두컴컴하긴 마찬가지였다. 집주인 가족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가까이 가기 전까지는 알아볼 수도 없었다. 나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정전과의 첫 만남이다.
집주인은 스마트폰 불빛을 이용해 집 곳곳을 안내했다. 현관을 열면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은 10인용 식탁을 놓고도 넉넉한 응접실이었고 TV가 있는 거실은 따로 있었다. 구조가 특이해서 방 개수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데(방과 방 사이 복도라고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정사각형이었고 방 사이즈에 맞먹었다) 둘이 살기에 넓다는 것은 분명했다.
근사한 식탁에 굳이 예쁘지 않은 비닐커버를 씌워 사용해야 했고 벽지와 카펫도 어색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생각에 신이 나기만 했다.
하지만 주방을 가보니 착잡했다. 이 넓은 집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주방이었다. 원룸에 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작디작은 싱크대가 남루한 몰골로 덜렁 놓여 있었다. 식기건조대를 올려두면 조리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뿐인가. 요리를 하다가 쉴 수 있는 의자나 테이블도 없었다.
주방 한쪽에는 약간의 턱이 아니라 무릎 높이 정도로 올라가야 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무슨 용도인지 끝내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걸터앉아 쉬기에는 쪼그려야 하니 편치 않고 완전히 올라가 앉기에도 번거롭고 불편하다. 게다가 식탁까지 가려면 방 두 개 정도의 거리를 지나야 했으니 어떻게 봐도 요리하는 이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설계였다. 그것은 여성이었을 테고.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이 나라의 특징이라면 있는 그대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전기였다. 집주인은 정전이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정전이 되지 않는 날이 드물었고 길게는 열 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없이 확인한 바, 그것은 우즈베키스탄의 특징이 아니었다.
정전이 되면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물을 전기펌프로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정전이 되는 순간 한 방울의 물도 쓸 수 없었다. 변기 물도 내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떤 날에는 머리를 감고 있다가 정전이 되어 대충 수건으로 닦고 나와 주방에서 생수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가스 공급도 내내 불안정해서 주로 하이라이트로 요리했으니 정전이 되는 순간 조리도 불가능했다. 매번 밥을 하기 번거로워 냉동밥을 만들어두곤 했는데 먹을 방법이 없었다.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쓸 수 없었다. 보조 배터리가 있다 한들 정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기에 함부로 쓰기 무서웠다.
창문이 있지만 열 수 없는 가리개로 햇볕을 꼼꼼하게 차단한 집이라 조명을 켜지 않으면 낮에도 어두웠다. 밝은 곳을 찾아 시장에 다녀온 적도 있지만 다녀온 뒤에도 정전이 끝나지 않았으면 더욱 난감했다. 근처 사는 친구도,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나는 동굴 같은 집에서 빠르게 피폐해져 갔다.
이 와중에 집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수시로 찾아왔다. 월세를 받기 위한 목적일 때도 있었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인 때가 더 많았다. 처음부터 방 하나를 잠가 놓은 채 쓰지 못하게 했는데(이 또한 황당한 일이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 방에 볼 일이 있다며 찾아와 몇 시간씩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놀다 가기도 했다. 창고의 물건을 가지러 오는 것은 부지기수.
두 달 넘게 버텼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애초 계약했던 6개월은 견디자고 해 나를 기겁하게 했다. 착한 남편이 어떻게 잔인해질 수 있는지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한밤 중에 가로등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미친 듯이 달리기도 했고 귀국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그제야 남편은 계약을 파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집주인은 계약 파기를 비교적 선선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시내 중심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했을 정도. 한국에서 온 새댁이 그 집에서 살 수 없을 것을 내심 예상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동네의 정전은 고질적인 문제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한국처럼 정전이 뉴스에도 등장할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시내 중심 지역은 그런대로 안정적인 전기 보급이 이뤄졌다. 하지만 외곽으로 갈수록 모든 것이 미흡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집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가 정전이 드문 일이라는 거짓말을 하긴 했으나 전 세계 어딜 가나 집주인은 좋은 말만 하지 않겠나. 그로서는 뻔히 정전이 심한 지역에 제 발로 찾아와 놓고는 정전 때문에 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 황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그의 탐욕이 부른 결과이기도 했다. 이사할 집을 찾아다니다 보니 넓은 수영장이 있는 집도, 사우나를 포함해 모든 시설이 잘 갖춰진 시내 중심의 이층 집도 그 가격이면 너끈히 빌릴 수 있었다. 그는 현지물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에 집을 임대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일종의 사기를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집은 남편의 현지인 동료가 소개해 준 집이었다.
그때 나는 불행했고 정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한참이 지난 지금은 다른 것이 궁금하다. 만약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 전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을까, 아니면 보란 듯이 빠르게 적응했을까.
아마도 나란 인간은 후자일 것이기에 뜨악해지곤 한다. 당시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나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자기연민에 몸부림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뭔가를 원할 때도 수시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었다. 그리곤 고민에 빠진다. 상대적인 고통은 고통이 아니란 말인가. 착잡한 결론이지만 덕분에 한걸음 멀어져서 상황을 보게 되었으니 해피엔딩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