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내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약 한 시간 정도를 날아가면 내가 살던 소도시에 도착한다. 비행편은 하루에 한 번뿐이고 내릴 때쯤엔 어둑어둑한데, 어두워진 풍광을 바라볼 여유 따위 없다. 공항(또는 항공사) 관계자들이 승객들을 내쫓듯이 재촉하기 때문이다. 짐도 아직 찾지 못했는데.
남편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지시를 따르지 않다가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공항의 시스템은 이러했다. 승객들은 일단 나간다. 철문 앞에서 기다린다. 닫힌 철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얼마 뒤 어둠을 뚫고 나온 누군가가 내 짐을 던져준다. 내것이 맞는지 역시 어둠 속에서 확인한 뒤 유유히 나오면 된다. 마치 비밀스러운 암거래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공항을 빠져나와 남편을 만났다. 드라이버가 함께 있어 드러내놓고 좋아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고 남편이 미리 계약해 둔 집으로 향했다. 비록 월세이지만 한동안 우리의 둥지가 되어줄 그곳으로.
그의 직장 주변에는 마을이 없었으므로 그는 통근에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소도시에 집을 구했다. 넓은 마당과 10인용 식탁을 갖춘 집이었다. 냉장고나 TV 등 되가져오기 어려운 가전제품을 모두 살 수는 없기에 풀옵션인 집으로 찾았고 이를 계약서에도 명시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집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밝은 미소로 환대해 주었다. 식탁 위에는 환영의 의미로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식사빵인 논도 놓여 있었다. 집주인은 몇 가지 안내 사항을 전달한 뒤 곧 떠났고 나는 고단한 몸으로 집 곳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우리가 마침내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실감하고 싶었으므로.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아무리 살펴봐도 세탁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는 물론, 다리미와 거대한 다리미판까지 있었지만 세탁기는 없었다. 늦은 시각이라 다음 날에서야 집주인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그는 간단히 말했다. 세탁기는 제공할 수 없다고.
어안이 벙벙했다. 풀옵션이라고 부르든, 풀퍼니처라고 부르든, 세탁기가 빠진 채 그 말이 성립할 수는 없지 않은가. 뒤늦게 계약서를 뒤적거려 봤지만 안타깝게도 가구와 가전제품을 제공한다는 두루뭉술한 말이 있을 뿐 세탁기를 콕 짚어 명시한 대목은 없었다.
못내 억울했지만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예정에 없던 거금을 주고 세탁기를 구매했다. 나는 우리가 호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량을 베푼 것이라고 여기려 했지만 씁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일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세탁기 보급율이 무척 낮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는 세탁기를 가진 집이 10%를 겨우 넘길 거라고 했고 누군가는 30%쯤 된다고 추정했다. 그보다 높은 숫자는 들어본 적이 없고 누구도 세탁기를 대다수가 갖고 있는 필수 가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 상식이 틀린 것이다.
여기에는 임금에 비해 턱없이 비싼 가격도 한몫할 테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수입이 있어 집과 차를 갖고 있더라도 세탁기는 우선순위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남편의 우즈베키스탄인 동료는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부부 싸움을 할 때면 세탁기를 고장 내겠다는 협박(?)을 한다고.
그는 농담이랍시고 말했지만 그 안에는 집안일은 오직 여성의 것이라는 고루한 인식이 드러난다. 내가 만난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은 전업주부든, 아니든, 독박 가사노동으로 인한 고충을 토로하곤 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이쯤에서 궁금하다. 한국은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 한국 남성의 가사분담률은 OECD 국가 중 최하위라고 한다. 세탁기와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빨래건조기 등등이 흔한 나라이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은 많은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원이다.
혹자는 말한다. 수많은 가전제품은 애초부터 가사노동을 덜기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며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가정을 타겟팅했고 성공한 것이라고.* 대개의 가전제품 광고가 여성 소비자를 공략하며 가사노동을 줄여줄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여성을 가사에 매이게 하고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가사노동으로 인해 고통스럽다면 더 많은 가전제품을 들일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이유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부푼 마음으로 찾아간 집에 세탁기가 없다는 사실에 경악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꼴이 좀 우습다. 어쨌든 그 집은 결국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으니, 세탁기보다 더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김덕호, <세탁기의 배신>, 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