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연애할 때 일이다. 불타는 금요일을 위해 예쁜 독채 펜션을 예약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간지럽지만 캐노피 침대와 실내 해먹, 커다란 욕조가 딸린 나름 '스윗'한 방이었다. 그날, 둘 다 퇴근 후 서둘러 출발했고 당연하게도 길이 막히고 또 막혀서 어두컴컴한 밤에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꾸물댈 틈이 없었다. 예쁜 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무르며 사랑을 불태워야 했으니. 우리는 열쇠를 받기 위해 관리실로 갔다. 도로 정체를 감안해 도착 예정 시각을 넉넉히 고지한 터라,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를 본 사장님이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이미 예약한 손님은 모두 도착했고 빈 방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문자를 보여드리며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결제도 완료했고 입실 안내 문자까지 다 받았노라고. 사장님은 퉁명스레 말했다.
"아니, 그랬는데 취소하셨잖아요."
나는 그런 적이 없노라 말했고 사장님은 증거를 보여주겠다며 수기로 된 예약명부를 들추기 시작했다. 곧 그의 어이없는 실수였음이 드러났다. 단지 성(姓) 한 글자가 같았을 뿐인데 다른 사람을 나로 착각해 예약을 취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사장님은 시원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멀뚱멀뚱 우리를 쳐다보며 방이 없는 걸 어쩌겠느냐는 말만 반복해 나를 더 기막히게 했다. 내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해 통 큰 양해를 하고 싶진 않았다. 환불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숙소를 빌릴 돈을 받아야 하는지, 기름값이라도 받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뭐가 됐든 억울할 것 같았다.
사과도, 대안도 없이 내 속을 타들어가게 하던 사장님은 잠깐만 기다리라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사뭇 태평해 보여 내 염장을 질렀다. 그때 사장님이 돌아왔고 마침 방이 하나 남았다고 했다. 나는 대략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방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미니 운동장이었다고 해 두자. 방은 방이었으되, 보아하니 단체 MT를 위한 방이거나 구조가 애매해 만들다 만 방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예쁜 것은 차치하고 추레한 침대도, 소파도, 식탁도 없었다. 텅 빈 방 귀퉁이에 있는 것은 생뚱맞으리만큼 작고 낡은 싱크대 하나. 그뿐이었다.
사장님은 곧 이불을 가져다주겠다며 미안함 1도 없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서 내가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 때, 여태 잠자코 있던 남자친구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한 방을 날렸다.
"우와, 방 넓다! 우리 여기 있으면 되겠다!"
나는 외치고야 말았다.
"여기서 축구할까? 어? 너랑 나랑 밤새 둘이 축구할래? 어?"
단전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에 찬 목소리에 남자친구도, 사장님도 놀랐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장님은 그제야 그럭저럭 쓸 만한 방을 구해왔다. 예약했던 방은 아니었지만 황량한 운동장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는 이 소동을 벌인 충분한 보상이 못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 혼자서 싸우고 싶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였다.
벌써 십 수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 봐도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사장님이야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사업이 번창하길 바랄 순 없지만 세상에 이상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그런가 보다 한다. 그날도,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착잡하게 하는 것은 순하고 착해빠진, 그래서 사랑했으나 그래서 때로 미워하게 되는, 지금의 남편이다.
나는 말한다. 때로는 싸우기도 해야 한다고. 나 역시 싸움이라면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는 때도 있다고. 내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한다고. 그때 너는 내 편이라도 되어야 한다고. 네가 남의 편이 되어 나를 궁지로 몰아붙이면 안 된다고. 그건 네 역할이 아니라고.
그는 수긍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겠노라 수없이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꼭 같은 일을 우즈베키스탄에서 또 겪어야만 했다. 그것도 여행지가 아닌, 우리의 살림집에서. 스위트홈을 기대하고 찾아간 곳에서 나는 지옥을 맛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