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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Sep 20. 2023

영화광이었습니다만

어렸을 때 나는 영화광이었다. 처음으로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다 본 건 다섯 살 때였다. 물론 텔레비전에서 해 주는 영화였고 엄마 아빠 사이에 엎드린 채였다. 우리 집에는 방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거실과 튼 안방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할머니와 언니, 내가 썼던 건넌방이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길고 좁은 복도가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은 엄마 아빠와 함께 안방에서 자고 일어났다.

텔레비전은 안방에 있었다. 처음 영화를 어떻게 보기 시작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늦게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나도 영화를 보겠다고 떼를 썼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가 곧 곯아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겠지만 다섯 살의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재밌었다. 고작 다섯 살밖에 안 된 내가 잠도 안 자고 영화를 끝까지 본 걸 기특하게 여긴 부모님은 손님이 오거나 친척들을 만날 때면 종종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다섯 살짜리가 꼼짝도 안 하고 영화를 얼마나 재밌게 보던지 말이야.”

나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기분이었다. 그 뒤로 영화가 방송되는 주말엔 늦게까지 안방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본 여러 영화에서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장총을 든 카우보이들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잘생긴 주인공이 나쁜 놈들을 소탕하고 별 것 아니라는 듯 피식 웃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하품을 하며 건넌방으로 가면 할머니가 불도 안 켜고 반야심경을 외고 계셨다. 할머니는 “다 봤어?” 묻고는 “얼른 자자.”며 자리에 누운 내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할머니가 이불을 매만지며 몇 번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면 내 자리에 누웠다는 편함과 함께 잠이 몰려왔다.

그 뒤로 토요 명화와 주말의 명화는 거의 빼먹지 않고 봤다. 초등학교 때도 틈만 나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봤다. 그 당시엔 홍콩 영화가 한창 유행이었다. 나는 천장지구라는 영화를 보고 유덕화라는 배우에게 홀딱 빠진 나머지 친구네 놀러 가면서도 비디오 가게에 들러 천장지구를 빌려서 가방에 넣고 갔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텔레비전 앞에 앉힌 후 영화를 틀어줬다. 나는 친구들 입에서 이 영화 너무 재밌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누군가는 빠져들었고 누군가는 지루해했지만 타율이 나쁘지는 않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천장지구를 30번 정도 보고 나니 내 마음도 조금 시들해졌다. 깡패들이 줄창 나와 칼을 들고 툭하면 휘두르던 홍콩 영화의 흐름은 도박을 소재로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찌르고 속이고 피 흘리고 죽는 홍콩 영화에 질린 나는 미국 영화로 고개를 돌렸다. 서부 영화뿐인 줄 알았던 미국 영화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내 취향대로 영화를 제대로 골라보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맨 처음 혼자 영화관에 갔던 건 중학교 2학년 때였고 그 이후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혼자 갔다.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설렜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만한 중학생이 보이지 않을 때는 또 다른 이유로 설렜다. 가끔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도 영화가 보고 싶어지면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조퇴를 했다. 그런 날은 아무 영화나 볼 수 없어서 ‘세계 100대 영화’ 리스트에 있는 영화를 고르곤 했다. 카사블랑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졸업, 길, 사랑은 비를 타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같은 영화들을 거의 섭렵했다. 도장 깨기처럼 리스트의 영화들을 지워나가는 것이 하나의 취미였다. 물론 꾸벅꾸벅 졸면서 본 영화도 많다. 그럼에도 그 당시 내가 깨달았던 건 좋은 것에는 꼭 이유가 있다는 거였다. 아무리 난해한 영화도 반드시 좋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내가 영화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좋은 구석은 꼭 있었다. 어느 때는 대사 몇 줄이었고 어느 때는 음악이었다. 배우의 표정이거나 어렴풋이 와닿는 감독의 목소리인 적도 있다.

영화를 잘 보지 않게 된 것은 이십 대 중반부터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친구들 중에 영화를 좋아하는 애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셋 중 둘은 취미가 영화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 취미도 영화라고 말하기가 싫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영화는 더더욱 보기 싫었다. 그러다 점점 영화와 멀어졌는데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영화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어두운 영화관에 두 시간이나 앉아 있는 게 좋지 않다. 그래도 가끔 집에 가족들이 없을 때 혼자 영화를 보면 오래된 흑백 영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저건 무슨 의미일까, 저 사람은 왜 그랬을까 진지하게 영화를 사랑하던 어렸을 때의 내가 다시 살아난다. 깊이 빠졌던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인지 일 년에 고작 몇 편밖에 보지 않는데도 그때의 감각이 돌아온다.

나는 화면 앞에 앉아 다섯, 일곱, 열둘, 열일곱의 나로 돌아간다. 엎드려 서부 영화를 보던 내가 이불을 쓰고 공포 영화를 보다가 홍콩 영화에 넋을 잃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며 꾸벅꾸벅 존다. 그 모든 내가 겹친 오늘의 나는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흰 자막이 검은 화면에 박힐 때마다 같은 박자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내년의 내 안에는 오늘의 내가 들어가 있겠지. 내년의 나를 위해 오늘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봐야지 결심하며 나는 비로소 얼마 전 책에서 읽은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김연수, <첫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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