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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Jun 25. 2024

가까스로 하루

한밤은 아직 서늘하다. 내 방은 베란다와 마주 보고 있어서 문을 활짝 열어두면 시원한 맞바람이 분다. 이 바람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간 곳 없이 사라지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잠결에 이불을 찾아 덮게 하는 새벽의 서늘함. 얼마 전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분명 들어 본 노래인데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rainy blue라는 일본 노래였는데 후렴구가 시작되자마자 이유 없이 그리운 마음이 솟구쳐서 놀랐다. 머리로 기억하지 못해도 마음에는 남아서 듣는 내내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애가 탔다. 남편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던 곡인가 싶어서 찾아보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제목을 발견하고 싶기도 했고 없기를 바라기도 했다. 결국 플레이리스트에는 없었는데도 남편이 좋아할 만한 노래야 하고 생각하면 흥얼거리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런 적 없어 하면 목소리가 사라졌다.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제 와서일까. 어째서 이제 와서야 남편을 잃은 일이 앞으로도 내 안에 남아 되살아나기를 반복할 거라는 걸 알게 된 걸까. 나는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없던 일처럼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 게 아니었다. 6년이 지난 지금에야 나는 어떤 일들은 없던 것처럼 잊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요즘의 나는 틈날 때마다 일본 드라마를 보고 일본 노래를 듣는다. 일본어가 들려오면 안심이 되어서 잘 때도 자주 드라마를 틀어놓고 잔다. 내게 일본어는 남편과 다름없어서 어쩌면 나는 드디어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있었던 일을 찬찬히 곱씹으며 그리워하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아서 무거운 상자에 담아 자물쇠를 꽉 채워 두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상자가 낡아버렸는지 자꾸 밖으로 새어 나온다. 무심코 본 일본 드라마가 트리거가 되어 나는 남편의 언저리를 서성인다.

기억나? 우리 같이 갔던 재즈 바, 사장님이 우리 자리로 와서 건넨 말, 당신의 투덜거림, 그때 당신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 슬쩍 웃던 거, 자긴 꼭 슬쩍 웃었지. 당신의 신청곡을 들으며 마시던 맥주, 그때 우리 사이가 아주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사랑했어.


이런 선명한 기억에 계속 빠져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은 불안하게 떠다녀서 어느 때는 나를 붙잡고 있는 게 힘들다. 어제는 퇴근길에 심리 상담 센터라는 간판을 보고 홀린 듯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유해피 심리 상담센터 3층 304호, 층별 안내도를 보고 찾아갔는데 문 앞만 서성이다가 돌아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왔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막막해져서, 이유도 모르겠는데 입도 못 떼고 울 것 같아서 돌아 나왔다. 돌아 나오며 다들 이 정도는 오락가락하며 사는 거 아닐까, 별것 아닌데 응석 부리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점점 뭐가 뭔지 모르게 자신이 없어진다. 사는 데 자신이 없어. 밤새 일본 드라마를 틀어놓고 자는 나도 이상하고, 즐거워 웃으면서도 마음 어딘가는 내내 슬픈 나도 이상하다. 문득문득 갑자기 눈물이 나는 나도, 가끔 자려고 누우면 이유도 없이 무서워서 잠이 안 오는 나도 다 이상해. 그런데 다들 이 정도는 이상하게 사는 것 같아서 이렇게 하루, 내일은 또 다른 하루, 모레는 또 그냥 그렇게. 그러다 보면 괜찮아지는 거 아닐까, 특별히 괜찮아지지 않더라도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걷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왜 울지 스스로 의아해하며 속수무책으로 울었다. 오른손으로 눈을 가리고 길가에 서서 울었다. 바람도 햇빛도 더없이 적당해서 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울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걷다가 이 모든 게 rainy blue 때문인가 싶어서 노래방에 갔다. 가서 실컷 부를 생각이었다. 며칠 반복해서 듣는 동안 가사는 외웠으니까 지갑에 천 원짜리가 있던가 헤아리면서 갔다. 호기롭게 문을 밀고 들어가 이천 원이나 넣었는데 결국 노래는 부르지 못했다. 일본 노래는 리모컨으로 검색이 안 된다고 해서 애꿎은 노래만 세 곡 부르고 나왔다. 나왔는데 들어가기 전과 무언가 바뀌었다.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는 길에 와인도 두 병이나 샀다. 슬플 때마다 술을 마시지는 말자고 다짐해서, 단골 술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비싼 와인을 두 병이나 샀다. 꽤 힘 준 결정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밥을 먹고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이 무지개처럼 걸렸다. 하늘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오늘의 모든 순간이 다행이었다고 중얼거렸다. 그 모든 순간 덕에 이 노을 앞에 서 있는 거니까 다행이네.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어서 다행,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되어서 다행. 나는 웃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일은 또 내가 모르는 날이라 다시 울 수도 있다. 결국 유해피 상담센터에 가서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어제 가까스로 하루를 살아냈고 그만하면 굉장한 선방이었다. 멍청하게도 매번 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데 아직까지는 매번 일어났다. 앞으로의 나도 잘 일어날 수 있기를, 나는 나를 응원한다. 누구보다 힘껏 나를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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