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원을 나서며
병원과 조리원에서 한 달을 보내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30여 년 간 충분히 많은 것을 깨닫고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아기를 낳고 나서 느낀 것들은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류의 것이었다.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무수한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와서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내 존재를 뒤흔들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해보지 않은 생각, 겪어보지 않은 신체의 변화, 그리고 전혀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까지. 마치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정말 단적인 예로 출산 3일 차에 가슴에 젖이 돌고 모유가 나오는 것을 보던 날, 남편과 나는 입을 떡벌리고 펄쩍뛰며 탄성을 질렀다. '우와 오아 대박!!!!!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 하면서. 그것은 마치 30년 간 익숙히 써오던 로봇에서 전혀 몰랐던 엄청난 기능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술 뒤 며칠을 누운 채로 보내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몸을 회복했다. 처음으로 소변을 보고, 몸을 일으키고, 미음을 먹고, 앉고, 서고, 걸으면서 마치 아기가 태어나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듯 하나하나 새롭게 시도해 나갔다. 그러면서 엄마의 처음 또한 갓 태어난 아기의 처음만큼이나 서툴고, 괴롭고, 대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태어나던 날 엄마도 아기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듯 하다.
아기에게 엄마가 필요하듯 엄마에게도 아기가 필요하단 것도 알게 됐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뭉쳤던 젖몸살이 풀리고, 자궁이 수축되어 서서히 원래의 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의 돌봄 없이 아기가 살아갈 수 없듯 아기의 존재 역시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이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는 생각보다 위대해서 저도 엄마를 살아나게 하고 또 나아지게 만든다.
아기에게서 나를 보곤 한다. 곤히 자고 있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나를 보듯 안쓰럽고 짠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애잔한 마음이 든다.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겠지, 우리 엄마도 이런 마음으로 나를 바라봤겠지 하고. 30년 간 궁금해하며 막연하게 상상만 해왔었는데, 아직 다는 몰라도 그녀의 마음이 어땠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아기를 키우며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사랑받지 못해서 울고 있는 상처받은 아이를 데려와 나의 아이와 함께 다시 건강하게 키워보고 싶다. 사랑을 듬뿍 줘가며 충분히 돌봐주다 보면 언젠가 다시 웃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 아이를 육아(育兒)하며 나를 함께 육아(育我) 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병원과 조리원에서 머무는 동안 나를 찾아오는 모든 생각들을 틈틈이 기록했다. 가장 처음 몸의 회복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병원생활 기록지>라는 이름으로 적기 시작헀던 수첩은 <슬기로운 산모생활>을 거쳐 <이로운 엄마생활>로 이름이 바뀌었다.
'딴딴이'라는 태명 대신 '이로운'이라는 석자의 이름을 갖게 된 나의 아들 덕분에, 엄마라는 낯선 존재로의 시작이 충분히 이롭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공간에서 시작할 새로운 삶이 기대된다. 나의 이로운, 나에게 이로울 엄마생활을 시작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