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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10억 벌어주고 인사고과대상 된 썰 -2-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았던 매니저와의 관계

by 곰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팀장으로부터 내 매니저의 이름을 전달받고 링크드인에 그녀를 검색해 보았다. 링크드인 프로필을 통해 사진으로 처음 확인한 그녀의 첫인상은 솔직히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국인들 중에 사진 못 찍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건 실물로 확인해 보기로 하고 우선 섣부른 판단은 제외. 프리랜서로 오랫동안 활동한 이력 탓인지 그녀의 링크드인에는 포트폴리오도 공개돼 있었다. 호기심에 눌러본 그녀의 포트폴리오는 너무나 기대치 이하였다. 채용과 면접에 참여해 보면서 수많은 CV와 포트폴리오를 봤지만, 기본 스토리텔링 구조가 보이지 않고 이미지만 딱 올려져 있는 형편없는 포트폴리오였다. 나라면 이 포트폴리오에 No를 보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거지? 포트폴리오에 첨부되어 있는 CV를 클릭. 그녀의 2페이지가 넘어가는 경력으로 비추어봤을 때 나이대가 나름 지긋한 중년일 것이라 예상은 했다.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팀장은 나의 새 매니저 켈리(가명)를 소개하며, 앞으로 최대한 매니저와 팀원들이 같은 오피스에 배치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 했다. 네덜란드, 독일, 영국, 미국, 캐나다,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에 사무실이 있는 우리 회사 특성상 매니저와 리포트가 서로 얼굴 한번 실제로 보지 못한 채 원격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이메일이나 텍스트보다 실제로 얼굴을 보고 만나는 것이 관계를 더 매끄럽게 하는 윤활유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무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가 마이크로매니저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와 내가 같은 런던 오피스에 근무한다는 것은 나의 스트레스를 과중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런던 오피스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웃지 않을 때는 차가워 보였지만 웃을 때는 나름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고 편안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전 매니저가 내게 이번 하반기 프로모션 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리겠다 약속한 상태였고, 이걸 지금 매니저가 바톤터치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이 관계는 나에게 너무나 중요했다.


2024년 9월쯤 브런치에도 글을 썼는데, 그 당시 켈리와 나의 관계는 막 시작 단계였고 나는 이 글에서 언급된 모든 내 매니징업 (Managing up) 스킬을 총동원했다. 항상 웃으며 긍정적인 모습, 특히 외부에서 매니저가 들어온 경우 기존 팀원들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에 최대한 그녀를 매니저로서 존중하고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 켈리가 의견을 낼 때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모습, 켈리의 매니저(팀장)에게 그녀의 좋은 아이디어들을 칭찬하고 그걸 켈리에게도 언급하는 등. 그러나 그녀가 들어온 지 4주 차. 갑자기 이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너 일이 너무 늦어.

그날은 내 제안으로 우리가 오피스 밖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한 날이었다. 이 모든 건 다 관계 다지기의 일환이었다. 켈리는 먼저 그런 제안들을 한 적이 없고, 오피스에서 만나더라도 사람들과 점심을 먹거나 어울리지도 않고 혼자 자리에 앉아서 8시부터 4시 반까지 컴퓨터만 매섭게 노려보다가 어느새 보니 퇴근하고 없는 스타일이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개인의 스타일이고 매니저와 관계를 다지는 것의 절반은 나의 몫이었기에 따로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너무나 당황했다. 그녀는 정말 말 그대로 "Your work is late"이라고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업무관계에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줄 때는 구조가 있다. 상황 (Situation) 상대방이 한 행동(Behaviour) 그리고 그 행동이 불러일으킨 결과 (Impact)을 명확히 설명해야 오해가 없는 깔끔한 피드백 전달이 도움이 된다. 그런데 켈리는 아무런 예시 없이 그냥 내 일이 늦는다고만 했다. 내가 당황한 사이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 시간관리가 문제인 것 같은데 너가 어떻게 회사에서 시간관리를 하는지 이야기해 줄래? 너 화, 수, 목요일에는 뭐 했어? 너 금요일에 자기 계발시간은 어느 정도나 써?"


너무나 당황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머릿속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부터 생각했다. 우선 지금 시간관리라는 문제에 말려들지 말고 가장 중요한 핵심부터 풀어나가보자. 켈리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늦는다고 생각하고 그게 시간관리 때문이라는 가정을 한 상태이다.


"피드백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매니저님 입장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혹시 어떤 프로젝트였고 그 일이 데드라인에 비해서 얼마나 늦었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녀는 내가 지금하고 있는 프로젝트 A가 상부로부터 늦어지고 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상부? 누구지? 혹시 켈리의 매니저인 팀장?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내가 켈리가 오기 전 팀장과 미리 상의해서 12월쯤에 결과를 내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지금은 10월이었다. 이미 데드라인을 상의했는데? 혹시 데드라인이 빨라졌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건가?


내가 이 상황을 더 정확히 알아가고 싶어 후속 질문을 하자 켈리의 얼굴은 보란 듯이 더 굳어졌다. 내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켈리는


"상부로부터 너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늦어진다는 지시가 왔고, 이걸 빨리 하라는 압박이 있어. 그러니까 너 지금 시간관리를 못하는 걸 해결해 보자고. 화, 수, 목에는 뭐 했어?"

머리가 아득해졌다. 도대체 왜 내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어떻게, 얼마나 늦은 건지 정확히 설명해주지도 않으면서, 지금 이 문제가 내 시간관리 문제라고 결론을 내린 건가. 내가 하고 있는 하루하루 일정들을 다 얘기해 달라는 건 영국 커리어 5년 내내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무례한 요구였다. 나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신뢰에 대한 문제라 느꼈다.


"매니저님, 저는 지금 제가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식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요."

긴 침묵 끝에 말을 골라 골라 내가 꺼낸 말은 단 하나였다. 이건 켈리가 내게 피드백을 주는 방식에 대한 짧은 피드백이었다.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시계를 보고 다음 미팅에 늦었다며 짐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아니, 너가 너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건 내릴 수 있지. 우선 지금 시간이 너무 늦었고 여기 너무 춥네, 다음 미팅에 너무 늦었다. 나 가야 돼, 안녕-"


그렇게 허무하게 상황은 끝나버렸다.




본격적인 마이크로 매니징 시작

그 일이 있고 다음날 아침 갑자기 슬랙이 왔다.


"앞으로 너가 하고 있는 모든 미팅에 나를 포함시키고 메시지에도 날 참고인으로 넣어줘. 고마워."


나는 그녀가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문제는 1:1 면담에서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보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문제였다. 그래서 우선은 군말 없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이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판단했다. 내가 주도하는 모든 미팅에 그녀도 초대했다, Optional (선택적)로 표기하여.


미팅 참석자를 Optional(선택적)으로 표기하는 건 미팅에 참여함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다만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하여금 가장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지,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겹칠 때 누구의 시간을 2순위로 배제해도 되는지의 명확함을 더 할 뿐이다. 이 프로젝트는 내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였고 -더 정확히는 내가 팀장에게 프로모션 케이스를 위해서 스스로 따낸, 그리고 팀장과도 내가 주도하기로 합의된 - 켈리는 이해관계자 (stakeholder) 들 중, 이 상황을 알아야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상의를 할 사람이었지만 일을 직접적으로 진행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별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다른 미팅 참여자에게 명확함을 전달하고자 한 optional 표시인데, 켈리와 내가 1:1 면담을 하기 전 서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들을 적는 스프레드시트에 그녀는 '내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 왜 나를 optional로 뒀는지?'라고 적어놨다. 미팅 초대를 보내고 난 지 거의 30분 만에.


켈리가 내가 주도하는 모든 미팅에 들어가고 메시지를 읽게 되고 나서부터 내가 하는 사사로운 행동 하나하나에 부정적인 피드백을 달기 시작했다. 우리의 1:1 스프레드시트는 켈리가 내게 보내는 판단과 평가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1:1 면담의 주제는 내가 아니라 켈리가 내게 보내는 부정적인 피드백들을 듣는 시간들로 변질되어 버렸다. 숨이 막혔다.



내가 미리 말을 할 수 없었던 이유

켈리가 본격적으로 내 프로젝트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게 마이크로매니징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온몸의 세포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이크로매니징을 하는 상사에게 피드백을 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필요한 문제였다.


우선 마이크로매니징을 당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바로 이야기를 하면, 이 이야기는 감정싸움으로 번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마이크로매니징 상사에게 "당신은 지금 마이크로매니징을 하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 봤자 방어적으로 대응할게 뻔했다. 그러기에 나는 그 일이 있고 하루 정도는 지난 후, 무슨 말을 할지 스스로 정립을 한 후에 - 최대한 켈리의 행동이 내 일과 생산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집중하는 대화를 하기로 정한 후 - 1:1 면담을 잡는 편이었다.


내가 1:1 면담을 좀 더 일찍 하자고 제안을 하면 켈리는 알겠다고 하며 1:1 면담을 옮겼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며 그녀는 항상 1:1 면담부터 미루고 통보했다. 또 옮기고 통보. 또 옮기고 통보. 이렇게 그녀가 1:1 면담을 늦추는 동안 마이크로매니징을 통한 나의 불만은 쌓여가고 있었다.


어렵게 면담을 잡으면 그녀는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하는 성격인데도, 상사라는 권력관계 안에서, 그리고 항상 미팅을 장악하고, 내 말을 끼어들고, 내가 말을 하기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부터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그녀의 대화 방식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30분 동안 면담을 잡아도 그녀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면담을 15분으로 줄이거나 말도 없이 10분, 15분씩 늦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녀가 15분 동안 자기 할 말 (보통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부족한 지에 대한 비판)만 쏟아내고 시간이 다됐다며 홀랑 나가버리는 패턴.



내가 피드백을 못 받아들인다고?

영국에서 보통 매니저와 스프린트 방식으로 일을 할 때는, 매니저가 일을 주면 내가 스스로 얼마만큼 일을 받을지, 언제 끝낼 수 있는지 조절할 수 있는 자율성이 있었다. 켈리는 항상 내가 하던 양보다 과도한 일을 줬고, 내가 그것에 대해 이건 내가 원래 하던 양보다 더 많은 일이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의하면 내 시간관리 문제, 능력부족의 문제라고 치부해 버렸다. 내가 예전 매니저들과 원래 하던 티켓들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해도 "이 정도 할당량을 하는 게 너에 대한 내 기대치야." 라며 말을 잘라버렸다.


용기 내어 우리가 스프린트를 진행하는 방식에 대해 건의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하는 방식은 어떤지 제안을 했다. 미팅 당시에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하면서도 그다음 스프린트 계획날이 되면 우리가 동의했던 일들은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것에 대해 내가 언급을 하면 "상부의 지시가 바뀌었고 우리는 이것에 맞춰서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불명확한 대답.


협의되지 않은 과도한 업무량, 내가 맡은 일에 대해 사사건건 참견하고 지시하는 태도, 1:1 면담에서 쌓여가는 비판 아닌 비난, 일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내 파일에 와서 이걸 해라 저걸 해라 1-3분 단위로 쌓여가는 코멘트. 오후 5시에 지시사항을 담은 코멘트를 10-15개씩 달고 나서 다음날 아침 8시에 왜 이게 완성돼있지 않나며 "일이 너무 늦는다."라고 재촉하는 태도. (심지어 개발자에게 넘기기로 한 데드라인은 일주일도 넘게 남았는데)

그것에 대해 용기 있게 "지금 우리가 협업하는 방식이 나의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훗날 그녀는 내 연말평가 퍼포먼스 리뷰에 내가 그녀에게 줬던 의견이나 피드백을 두고 "일을 처리해내는 태도나 능력이 부족하다." "상사의 피드백을 잘 못 받아들이며 상사의 의견에 비협조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라고 써놓았다.)



시작된 번아웃 증상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몸이 시도 때도 없이 가렵기도 했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치솟았다. 살이 8kg가 넘게 쪘다. 낮에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상사의 연락과 미팅을 해내느라 화장실을 잘 못가 수면 중에 밤에 화장실을 5번이나 가는 이상한 패턴을 보이기도 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는커녕 하루하루 이겨내는 것이 버거웠다. 내가 좋아하던 일들을 피곤하다는 이유로 포기하게 되고, 주말엔 집안일만으로도 진이 빠졌으며 친구들을 만날 힘조차 없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때 이미 번아웃을 겪어본 나는 이게 무엇인지 잘 알 고 있었다. 번아웃이었다. 참다못한 나는 이 일을 팀장에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인사팀 (HR)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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