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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Apr 26. 2022

나 지금 떨고 있나?

세상에는 많은 경계가 있다.

어떤 경계는 너무 분명해서 한눈에 드러나지만 또 어떤 경계는 대략 모호해서 억지스러운 구분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울타리 너머엔 분명 보이지 않는 교묘한 이질감이 존재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 또한 무수히 많은 경계 안팎에서 혹은 그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왔다. 경계 안에서 때로는 그 틀을 깨기 위해, 때로는 그 틀 안에 머물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말이다.




난 학군 중심의 지역이 형성되기도 전 막 개발이 시작되던 즈음 이사 온 원조 입주민이다. 초, 중, 고를 같은 동네에서 나왔고 아직도 친정 부모님은 그곳에 거주하시는 말 그대로 ‘동네 토박이’이다. 아파트 단지의 삶이 그렇듯 단지 내에서 웬만한 것들이 다 이루어지니 동네 밖을 떠날 일이 거의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유학을 떠날 때까지 우리 아파트와 건너 백화점을 잇는 길을 한 변으로 한 사각지대에 안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거의 여행가 수준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린 나는 꽤나 용감한 아이였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새로운 음식도 활동도 배움도 거침없이 도전했고 그런 나의 용맹함(?)을 부모님은 늘 대견해하셨다. 그러나 그 용맹함은 무모함이 되어 고딩 시절 방황의 기폭제가 되었고 너무 일찍 뜨거운 물에 데어봤기 때문이었을까, 그 데인 기억들을 떨쳐내고 굳은 살을 딛고 일어서지 못한 채 성인이 된 나는 다시 안전한 사각지대로 숨어들고 말았다.


변화가 두려운 인간

난 극도로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세상에 나를 맞춰가는 일은 하나도 안 신나고 안 설레고 그저 구찮고 번거로운 일이니 얼리 어댑터라는 자들은 나와는 상극, 핸드폰 기능 새로 알아가는 것도 너무너무 구찮아서 구폰을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쓰는 사람이다. 나의 친구들은 여전히 어려서부터 함께 지낸 동네 친구들이고 사람을 만날 때 호구 조사하고 어디 사는지 어느 학교 다녔는지 다 물어보고 만난 게 아닌데도 관계를 쌓아가게 된 사람들은 결국 알고 보면 비슷한 동네 출신이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결국은 예전에 알던 누구, 그의 친구나 후배나 선배 누구, 한 다리 건너면 알고 아는 것이 나의 모든 관계의 시작과 끝이었다. 오죽하면 우려먹고 우려먹고 재탕에 삼탕을 반복하는 나의 만남 패턴을 보고 내 친구들은 이제 곰탕질 좀 제발 그만하고 어디 모르는 동네 가서 새로운 사람 좀 만나라고 떠밀 정도였다. 회사에서 만난 신랑 또한 알고 보니 중학교 때 유학 갔던 친구가 미국에서 알고 지내는 후배라고 데리고 나와 한번 놀았던 적이 있던 ‘구면’이었다. (그때는 그게 운명인 줄 알았지만 사실 워낙 좁은 세계에서 머물던 내 삶에서 그런 우연은 아주 드문 경우는 아니었다)


경계 안에 머무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삶의 경계 안에 있을 때 난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이 안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안전했고 20대의 인간관계는 모두가 미숙하기 때문에 실수를 통해 배우는 과정이었지만 진짜 엄한 인간을 만나 숭한 일을 당한 적이 없는 건 역시 그 모든 관계가 이 경계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비슷한 경계 안에 있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미국에 가면서 처음으로 나의 경계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거의 유학생들 끼리만 몰려다니는 꼴불견 유학생이었던 관계로 이민 사회는 나에게 너무나 낯설었고 일가친척 , 사돈의 팔촌까지 싹 털어도 나와는 삶의 교집합이 전혀 없는 사람들과 새로운 경계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경계론이 아니더라도 30대 넘어 성인의 인간관계가 어릴 때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과 문화적 차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수차례 겪으며 나의 배타적인 성향은 더욱 견고해졌고 언젠가부터는 그 밖으로 나가서 경험하고 싶은 의지조차 없어졌다.

그 낯선 세계를 견딜 수 있던 유일한 힘은 가정과 신앙이었다. 주어진 모든 낯섬이 교만한 나를 깨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가운데 나에게 허락된 가정은 무엇보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난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다. 아내이자 엄마라는 내 자리는 무엇보다 안전하고 견고한 성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바벨탑처럼 쌓아 올린 견고한 성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된 사람들처럼 소통이 막히자마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경계 밖으로

나의 울타리는 이제 더 이상 나와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게 되었고 난 스스로 경계 밖으로 나가는 모험을 앞두고 있다.

틀을 깬다는 건 그 깨짐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 경계 너머의 시선과 삶을 견딜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


40대의 내가 마주한 현실은,

이제 더 이상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하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각자 삶의 무게로 내 삶의 짐까지 같이 져주길 기대할 수 없는 오빠와 동생,

그리고 언제나 나를 지지하지만 거기까지의 역할인 친구들과 지인들.

나는 먹고살 길을 찾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야 하고

경계 밖의 낯선 세상에서 혼자 견뎌야 하고

아이들을 향한 죄책감과 실패로 인한 좌절감과 싸워야 한다.

그럼에도 그 경계 밖으로 발을 내딛는 것은 온전히 나의 결정이며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이다.

그래서 이미 그 선을 넘으려 한 쪽 발을 들고 있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나는 지금..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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