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은 누가 만든거야 대체. 하루에도 몇 번을 집에 가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 말 속엔 주술적인 느낌도 있다. 나를 괴롭히는 그 무언가에서 저 말을 뱉는 3초의 시간 동안 잠시 해방 될 수 있다.
본투비 집순이라 할 만큼 집에서는 하나도 심심하지가 않다. 집에서 행하는 나만의 루틴은 넘쳐나니까. 휴일 아침 레고 조립하는 나를 방해하는 강아지에게 코잔등 경고 주기라던지 턴테이블을 알콜솜으로 닦기, 책 색깔 별로 책장 정리하기,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누워있기와 같은 이 모든 행위들은 내게 평안함을 가져다준다. 맞다. 평안함, 내가 좋아하는 공간의 기준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집은 현재 완벽하게 기준에 부합한다.
주말 동안 드라마를 봤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었다”라고 하던 주인공의 말이 어찌나 콱 박혔는지 며칠 동안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른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나 또한 그런 마음이 들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집이 불편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중고등 시절을 뛰어 넘고 찾아온 사춘기 때문이었을거다. 시작은 “XX이는 원래 그래”라는 말이었다. 내 뜻과는 다르게 해석되는 말이라니. 우리 그래도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딱하면 척 하고 알아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끔씩 가족들의 말, 행동이 갑자기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고 심지어는 무례하게 들리기도 했다. 어느 순간 가깝다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주말 저녁식사 후 가족들과의 과일 타임이 재미없어졌다. 집이 편치 않았다.
어디에 머무는 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평화로운 내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독립 생활에 이만큼의 돈이 새어 나간다는 걸 알았다면 그들의 무례한 말도 꾹 참아냈을 것이다.) 그렇게 집을 떠나 평안한 나만의 집으로 만들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가 뒤따랐다. 나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는 집을 떠나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은 이따금씩 외롭기도 했다.
이불 하나, 수저 하나, 침대 옆 스탠드 하나, 차근차근 조그마한 이 공간을 채워나가면서 내 작은 마음은 더 크는 중이다. 오롯이 나로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인간으로 자라는 연습 중이다. 가족들과는 더 애틋해졌다. 본가에 가서 저녁 식사 후에 과일 타임에서 풀어낼 얘깃거리를 모아두는 주책바가지가 됐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 편히 둘 수 있는 곳이 두 곳이나 되다니. 내 이름으로 된 집은 없다만, 그래도 잘 살고 있다. 나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