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펭귄 Jun 01. 2021

명복을 빌어요, 그대들의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켠 직후 늘 하는 습관 중 하나가 있다. 포털사이트를 켜서 그날그날의 화젯거리를 뉴스로 읽는 일이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든 지 기껏해야 일고여덟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달라지는 확진자 수, 온 세상을 들썩거리게 하는 열애설, 정치판의 시시콜콜한 이슈들. 이런 것들을 머릿속에 입력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최신 동향으로 업데이트된 내가 된 기분이다.

  며칠에 한 번 꼴로 틈틈이 부고도 들려온다. 개중에는 이름 모를 유명인, 80년대 경제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정재계 유명인사, 좋아했던 연예인의 자살 소식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한때 누구도 남부러울 것 없이 빛났던 생이던, 한없이 평범했던 생이던 모두 짤막한 몇 줄의 기사로 갈음된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우여곡절들은 그렇게 몇 줄의 기사로 요약되어 잊힌다.


  최근 시사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한강 의대생 사건은 마음이 아파서 제대로 읽지 못했다. 수많은 경위와 의혹과 카더라 통신들이 난무했지만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스치듯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은 마스크 너머로도 형형하게 번뜩이던 손정민 군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단호하고 강경해서 나는 더 슬펐다. 하나뿐인 자식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질 텐데 불확실한 사실들이 많은 상황에서 혹시나 모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토록 강해져야 했을 사람. 강한 표정으로 버티고 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한없이 무너져서 아들을 그리워하며 어린아이처럼 울겠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사람이 겪을 수 있은 고통의 최대치를 100으로 환산한다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은 95라는 이야기를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선가 본 적이 있다. 본 지 오래된 그 문장을 나는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며칠 전에는 혈액암인 악성 림프종으로 투병하던 뷰티 유튜버 '새벽'님이 오랜 투병을 마치고 하늘로 떠났다. 언젠가 암 때문에 머리를 삭발하고도 정말 아름다웠던 그녀의 사진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마치 어제와도 같았다. 기사를 보고 너무 놀라서 들어간 그녀의 인스타그램 마지막 피드에는 꽃나무 아래에서 환하게 웃는 사진과 함께, '병원에서 나가면 이맘때 날씨가 되어있을까요?'라는 짤막한 물음이 적혀 있었다. 가슴이 꽉 하고 메어오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분명 이렇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상념은 그 단 몇 줄의 기사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뒤로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게시물이 올라온 날짜는 한 달 전.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을, 그리고 그 힘겨움이 절정에 달한 어느 순간 하늘로 떠났을 그녀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마치 나와 엄마가 함께했던 마지막 날들처럼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또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서 더 슬펐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슬픔에 잠겨 있을 가족들을 생각한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고통이 이제는 너무 상상이 된다.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어서 괴롭다. 가끔은 차라리 모르는 게 훨씬 나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디 너무 많이 아프지만은 않기를.

  

  꽃처럼 예쁘다 떠나간 이들의 명복을 빈다.


작가의 이전글 승일희망재단에 쓰는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