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와 뤼미에르의 도시.
처피뱅의 요크셔테리어를 만나다
리옹Ryon은 유럽 여행 도중 잠시 들렀다 가는 도시로 유명하다. 프랑스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파리에서 스위스를 갈 때나 몽블랑, 니스 등 주요 관광지를 갈 때 거쳐가게 된다. 나 또한 니스로 가기 전 가볼 만한 도시가 없을까 찾아보다 리옹에 머물게 됐다. 3박 4일간의 일정이었다.
리옹 여행의 거점은 할머니가 혼자 살며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숙소였다. 백발의 단발머리를 한 크리스틴Christine은 매일 바게트 토스트와 커피, 복숭아잼, 버터, 생강차 등으로 2인분의 아침식사를 차려줬다. 커피는 국그릇 크기의 대접에 담아 줬고, 글루텐 프리를 실천 중인 본인을 위한 비스킷은 따로 준비했다.
이 소소한 조찬 모임은 책의 도비라扉 같은 시간이었다. 검은콩 크기의 구멍이 숭숭 뚫린 곡물빵의 단면을 보여주며 "좋은 빵집을 찾았다"라고 자랑하는 크리스틴의 서툰 영어, 분홍색 설탕을 입힌 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베이커리계의 공주님 프랄린 브리오슈Praline Brioche, 먹에 젖은 붓처럼 검게 물든 털을 우아하게 풀어헤치고 종종걸음을 옮기는 요크셔테리어 삐브앙Pivoine. 하루를 펼치기에 안성맞춤인 장면들이었다.
그중 삐브앙은 크리스틴의 영화 친구 오딜의 반려견이다. 리옹 둘째 날 밤 오딜과 삐브앙이 크리스틴의 집 거실에 묵으면서 이들과도 아침을 함께 먹게 됐다. 삐브앙은 꽃 작약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다. 프랑스는 반려견의 이름을 지을 때 태어난 해에 따라 정해진 머리글자를 써야 하는데, 삐브앙이 태어난 해는 'P'의 해였다. 서류상 등록할 때 필요한 이름일 뿐 실제로 부를 땐 꼭 머리글자 규정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오딜은 'P'로 시작하는 멋진 이름을 생각해 냈다.
삐브앙은 작약만큼이나 매력 있었다. 눈 위 털들만 짧게 자르고 나머지 털들은 길게 늘어트린 처피뱅 스타일이었다. 오딜은 전날 열린 삐브앙의 생일파티 사진을 보여주며 내게 "삐브앙이 웃고 있는 게 보이느냐"라고 물었다. 귀여운 주인과 귀여운 강아지. 리옹의 아침. 우리는 잠옷 차림으로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생텍쥐페리와 뤼미에르의 도시
파리에 살던 크리스틴이 리옹에 처음 왔을 때 느낀 인상은 '슬픈 도시'Sad city였다. 지금은 처음 왔을 때보단 녹지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 돌아다녀보니 크리스틴의 표현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파리에 비해 생명력이 부족하고 삭막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인구 밀도가 낮고 평균 연령도 높은 편이어서 단조로운 흑백 사진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식당도 오후 7시 이후에나 열고, 풀보다는 콘크리트가 많이 보였다. 프랑스에서 파리, 마르세유 다음으로 큰 도시라는 한 여행자의 설명에 약간은 갸우뚱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옹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와 뤼미에르 형제의 도시라는 점에서 끌렸다.
리옹 중앙의 광장Place Bellecour에는 생텍쥐페리 동상이 있다. 광장 변두리에 외로이 자리 잡은 이 동상은 큰 나무에 가려져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생텍쥐페리를 기리는 박물관이라거나, 기념품숍, 어린 왕자 서점 같은 장소들을 기대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동상 앞에 서서 굳어 버린 생택쥐페리를 잠깐 바라본 뒤 사진을 찍었다. 그런 나를 보고 지나가던 주민 한 분이 "누군지 아냐"라고 물었다. "알죠! 어린 왕자!" "맞아! 양 한 마리만 그려줘!Draw me a sheep"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뤼미에르 박물관Musée Lumière은 관광지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부지 중앙에 작은 잔디공원이 있고, 영화관도 있다. 영상과 이미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내 미소 지으며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사용한 카메라들과 입체 사진 촬영 기법, 디지털화된 기록물들이 상당량 전시돼 있다. 규모가 작아 보여 큰 기대 없이 방문했는데 예상외였다. 원통형 석고상 구조물과 깜빡이는 조명을 활용해 애니메이션을 구현한 전시 작품이 인상 깊었다. 여운을 간직하며 굿즈숍에서 조카에게 선물할 뤼미에르 형제 티셔츠와 미니 그림자놀이 카드, 기념품 연필을 샀다.
리옹의 거리, 그리고 먹거리
리옹은 대형 벽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창문이 없는 건물 외벽에 창틀을 프레임으로 한 그림을 그려 넣어 착시를 유도하는 벽화가 많다. 이 지역 중요 인물과 사건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도시가 간직한 기억을 오래토록 기억하기 위해 벽에 새겨둔 셈이다.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걷는 게 불안하거나 익숙지 않다면 유명한 벽화들을 거점 삼아 걷는 것도 괜찮다. 도시의 도서관The library of the city, 리옹인들의 프레스코화Fresque des Lyonnais, 토니 톨렛에 대한 찬양Hommage à Tony Tollet 정도가 유명하다. 그림들을 보다 보니 한국 지방에 퍼져 있는 수많은 벽화 마을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리옹을 한눈에 감상하고 싶다면 푸르비에르 노트르담 대성당Basilica of Notre Dame of Fourvière이 자리한 푸르비에르 언덕을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크리스틴은 이 성당이 "지나치게 화려하다(장식적이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리옹인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고 한다. 다만 크리스틴은 날씨가 좋을 땐 그곳 전망대에서 몽블랑 산이 보이기도 하니 시간이 있으면 가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놓칠 수 없지"라는 생각에 푸르비에르로 행전지를 정했다.
크리스틴이 추천해 준 리옹의 명물 소시송 브리오슈saucisson brioché를 한 조각 사들고 잘 닦인 산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 그늘이 빼곡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사람이 너무 없길래 길을 잘못 든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높은 쪽으로만 간다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도착한 전망대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넓은 피크닉 벤치가 여러 개 있어 자리를 펴고 (실은 그냥 소시지빵인) 소시송 브리오슈를 맛봤다. 퍽퍽한 식빵, 그리고 지방이 뚱뚱하게 들어찬 살라미를 한꺼번에 입에 넣고 먹는 맛이었다. 이날 먹은 게 별로 없어서인지 질리지 않고 다 먹었다. 아쉽게도 몽블랑 산은 보지 못했다.
홀로 여행의 묘미는 도전이다. 프랑스 '미식의 도시' 리옹에 왔으니 식당을 예약해 코스 요리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가져온 옷 가운데 그나마 가장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레스토랑LE BISTROT ABEL에 들어섰다. 300년의 역사를 가진 레스토랑이라고 한다. 일단 레드 와인부터 홀짝였다. 그리고 다진 고기를 차갑게 식힌 전채요리 테린terrine, 너무너무 느끼해서 절반밖에 못 비운 어묵 메인요리 크넬quenelle, 강한 치즈향이 코끝을 감싸는 디저트 까망베르 샐러드가 차례로 나왔다.
코스 요리는 언제나 지나치게 배부르다는 게 문제다. 이미 테린으로 배를 채워버린 나는 남은 코스를 모두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입맛에 맞지 않기도 했다. 특히 크넬은 그라탕에 푹 적셔 눅눅해진 생선 맛 빵을 먹는 기분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저택에 사는 할머니가 손녀 주려고 구운 청어 파이가 바로 이 맛일 것 같다. 손녀가 싫어할 만도 하다.
와인을 마저 들이키고 숙소에 돌아가 거울을 보니 입가에 와인 자국이 빨간 마스크처럼 검붉게 남아 있었다. 혼자 마시는 와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런 건 아무도 안 알려준다.
시들어가는, 하지만 아직 시들지 않은 도시
리옹이 가진 캐릭터를 명확히 표현하기에는 짧은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들러보라"라고 말하고 싶은 도시라는 건 분명하다. 리옹의 공원Parc de la Tête d'Or을 둘러보며 찍은 사진들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