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여행은 날씨가 전부잖아요?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Les jardins de Claude Monet à Giverny으로의 당일치기 여행을 잡은 날 하필 비예보가 있었습니다. 사실 비 오는 날의 정원이라면 마다할 것 없었죠. 오히려 좋다는 생각으로 파리의 민박집을 나섰습니다. 기차도 넉넉하게 5시간 여유를 두고 왕복으로 구매했습니다. 아주 샅샅이 살펴보고 오겠다는 생각이었죠.
여유롭게 예약하길 잘했습니다. 기차가 20분 지연됐거든요. 지베르니행 기차는 자유석이었는데 좌석이 맞은편 승객과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좁았습니다. 20분 동안 꼼짝 않고 선 기차에 앉아 있다 보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습니다. 창가에 앉은 터라 몇 번이고 "빠흐동"(죄송합니다...)를 외치며 좌석을 빠져나와야 했죠. 그런데 기차 내 화장실이 고장이더군요. 문이 아예 안 열렸어요. 직원에게 물어보니 앞쪽 칸에는 화장실이 작동할 거라고 해서 기차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돌았지만 작동하는 화장실은 한 군데도 없었어요. 화장실을 찾다 보니 기차는 어느새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망연자실하며 자리로 돌아가는데 한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직원에게 역정을 내고 있더라고요. 문이 열린 화장실을 가리키며 멀쩡해 보이는데 왜 쓸 수 없냐고 신경질을 내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나' 싶었던 찰나 그 여자가 엄마 얘기를 하더라고요. "엄마가 나이가 많아 소변을 참지 못한다. 긴급한 상황이다"라고. 갑자기 그 여자가 이해가 가면서 저도 답답해지더라고요. 들어보니 변기 물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같은데 어떻게든 사용하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정말이지 제 일이라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죠.
저는 이 사태의 결말까지는 못 보고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빠흐동"을 연발하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창 밖을 바라보며 그 여자의 심정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잠시 그리워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베르니로 가는 꼬마 기차는 30분 뒤에야 온다고 하고, 대형 버스를 타기 위한 줄도 끝없이 늘어서 있어 그 뒤를 이을 엄두가 안 나는 겁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자전거였습니다. 자전거가 오래돼 보여 가는 길에 주저앉는 게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는데 한 번 빌리는데 10유로라고 하더라고요. 탈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분증을 맡겨야 된다고 했는데 제가 안 가져왔다고 반복해 얘기하니 그냥 쓰게 해 줬습니다. 몽생미셸에서 그렇게 자전거에게 배신당하고도, 저는 다시 핸들을 잡았습니다. 기차역이 있는 마을Vernon부터 모네의 정원까지는 1시간 거리였습니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 정원 근처에 도착하니 온몸에 힘이 풀리고 배가 고파왔습니다. 일단 정원이고 뭐고 작은 카페Gourmandises de Giverny에서 끼니부터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서브웨이처럼 이것저것 토핑을 선택해 넣은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기가 막히게 맛없는 조합을 고르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건강식을 먹게 됐습니다. 샌드위치 절반을 남기고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잠시 쉬었습니다.
모네의 정원에 들어가기 위해 거의 40분간 줄을 섰습니다. 다들 삼삼오오 수다 떨면서 기다리는데 저만 외로이 서있었습니다. 한국이라면 들리는 대화를 엿들으면서 시간을 때울 텐데 제 앞의 커플이 너무 소곤소곤 영어로 말해 잘 알아들을 수도 없더라고요. 나홀로 여행객의 숙명이죠. 기다림 끝에 정원에 입장! 먼저 모네가 살던 집 외부를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초록색 창틀과 문, 외벽 전체를 감싸는 덩굴이 인상 깊은 건물이죠.
내부에는 일본 민화가 생각보다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모네의 정원 자체도 일본 목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만큼 모네는 일본 예술의 빅 팬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 또한 모네의 수련 그림에 열광했다고 하니 모네의 영혼에는 어쩌면 일본인의 영혼이 서려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파스텔톤의 장식장들과 도예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오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집 출구와 이어진 부엌에서 소나기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마치 모네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비가 내리자 총총 실내로 쏟아져 들어온 것 같은 모양새였습니다. 그 공간에서 뭔가 채 가라앉지 못한 흥분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창틀을 통해 바라보면 정원이 운치 있었습니다.
비가 점점 얇아졌습니다. 이슬비 정도로 약해졌을 때 밖으로 나갔습니다. 비에 젖은 정원은 자기 본연의 색을 마음껏 뽐냈습니다. 햇살이 강할 땐 모든 풍경이 찬란하게 빛나지만, 비 온 뒤 흐린 날에는 모든 풍경이 치장 없이 순수해집니다. 연못에 퐁당 빠져드는 빗방울, 아이들의 우비에 투두둑 튕기는 빗방울, 나뭇잎 한 장에 고였다 한꺼번에 떨어지는 빗방울... 개성 강한 빗방울 소리도 잔뜩 들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록색 다리보다는, 촉촉하게 생기를 뿜어내는 꽃잎과 풀잎들이 더욱 눈에 들어왔습니다.
파리에서 인상주의 작가들의 그림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조금 질리는 느낌도 있어 건너뛰려 했지만, 시간이 남을 것 같아 지베르니 인상주의 미술관Museum of Impressionism Giverny도 들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작품 수도 적고 크게 인상에 남는 작품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지베르니라는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게 더 나을 뻔했습니다. 비만 안 왔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미술관 앞 정원 벤치에서 글을 좀 쓰다가 남은 샌드위치 반 조각을 먹고 저는 다시 자전거 탈 준비를 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워낙 바람이 많이 불어 벌벌 떨면서 자전거를 타야 했죠.
이 글을 마치며 지베르니에서 기차역까지 자전거를 타며 만난 몇몇 장면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모네의 정원은 많이들 보셨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