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의 노인이었다. 그렇다고 왜소하지는 않았다. 불룩 나온 배와 떡 벌어진 어깨가 오히려 단단했다.
전기가 끊긴 공장 내부는 어두침침했고, 흙이 드러난 바닥은 검은 기름때에 물들었고, 굵은 H빔이 어둠 속에서우두커니 동서남북으로 서 있었는데, 슬레이트 지붕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살 몇 가닥만이 겨우 흐릿한 빛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노인이 너른 공장 한가운데 서서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지게차 기사가 마지막 남은 커다란 기계를 옮기는 중이었다-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덩그러니 서 있던, 천장에 닿을 듯한 호이스트에 매달린 커다란 쇠갈고리가 마치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 흔들렸다.
겹겹이 접힌 주름 사이로 노인의 두 눈동자가 가끔 반짝였을 뿐 노인은 한참 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40년 동안 공장을 운영하며 노인에게 힘든 시절도 많았다. 특히 IMF를 지날 때는 여러 번 공장 문을 닫아야 할 위기가 있었고 한 번은 거래처 부도로 파산 직전까지 몰렸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노인은 눈을 감고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노인의 의지가 강했다기보다는 꼭 같은 처지인 사람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도 다 힘들었으니까 견딜 수 있었던 게지.' 다른 이들도 다 죽겠다고 하니 오히려 그게 위로가 되었다. 망해도 다 같이 망하면 덜 억울한 법인가 보다.
그런데, 여기 재개발구역은 좀 달랐다. 노인이 쫓겨나는 땅에서 누군가는 돈을 벌 거로 생각하니 억울했고 노인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울화가 치밀었다. 칠십이 훌쩍 넘은 그의 심보가 고약하다며 나무랄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도통 분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스크 위로 눈만 껌뻑이던 노인이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로 “40년 동안이나 한 곳에서 공장을 돌렸는데, 결국에는 이리 쫓겨나가는 신세가 되었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재개발구역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하듯이 “더 좋은 곳을 찾을 거예요”라고 말했고 노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독촉에도 꿈적 안 하던 공장이 이사 중인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바로 그때, 빈집 기와지붕 용마루에서 검은 까마귀가 날아오르며 깍 소리를 질렀고, 그와 동시에 공장 단지에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 같은 비명이 허공을 찢기 시작했다. 한 번은 짧게 또 한 번은 길게 악 소리가 이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너무나 현실적이지 않은 소리였다. 머릿속이 멍한 느낌이었다. 멀리 사거리에서 구급차가 급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을 때 검은 재를 얼굴에 뒤집어쓴 한 여자가 내지르는 비명이 공장 내부를 가득 메운 통에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고,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 앞쪽에 노인이 쓰러져 있었고, 노인 머리 위로 마스트(지게차 앞쪽 쇠기둥) 꼭대기까지 올라간 지게 발이 허공에 떠 있었다. 지게차 운전석에서는 한 남자가 입을 반쯤 벌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노인의 사위였다. 그의 아내는 바닥에 쪼그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천장 아래에 쌓아둔 물건을 꺼내기 위해 지게차 발 위에 올라탔다가 아래로 떨어졌다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노인이 의식을 차렸다. 구급대원은 노인의 다리가 부러졌지만 찢어진 머리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아버지를 뒤쫓던 딸이 털썩 주저앉았다. 휴대전화를 든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대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첫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저편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까짓 게 뭐라고, 이까짓 게 뭐라고……."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고 벽에 부딪힌 소리는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사 독촉을 했던 당사자는 노인이 빨리 회복되기만 빌었다. 달리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감정평가를 다시 하는 날이었다. 재개발 조합에서 평가한 보상금액에 불만이 있을 때 당사자는 토지위원회에 이의제기 신청을 하여 재차 감정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미 공장문을 닫았어도 법적인 절차는 계속 진행된다. 다른 곳에 문을 연 옛 공장 단지의 사장들이 오랜만에 모였고, 하나같이 감정평가사에게 기존 평가금액이 상당히 불합리했다고 저마다의 사정을 설명했다.
노인을 다시 만난 건 몇 달 만이다. 다친 곳은 얼추 회복된 것 같다. 이사한 공장에서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웃음기 띤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노인이다. 맞잡은 손이 두툼하다. 그리고 따스하다.
비어있는 공장에는 바깥보다 더 찬 공기가 흐른다. 느린 걸음으로 공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싸늘하게 식은 철 기둥을 두어 번 만지고,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 놓은 나무 팔레트를 반듯하게 세우고, 몇 걸음 걷는가 싶더니 멈춰 서서 고개를 꺾고 천장을 본다. 몇 분 동안이나 미동도 없다. 살점이 모두 사라진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공장이다. 곧 그 뼈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 말이 없는 노인의 마음을, 알 듯 모르겠다. 모르는 듯 알 것도 같다.
노인이 이사를 한 새 공장에 불이 났다고 한다.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타버렸다고, 거기에 주위 공장에까지 불이 번져서 그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그런데 미처 화재보험에 가입하지도 못한 상태라고, 다친 사람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소식이었다.
까맣게 타버린 공장에서 뼈만 남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노인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커다란 행운을 붙잡았다가 그만 잃어버린 노인과 그에게 친구가 되어준 한 소년의 스토리.
40년을 근근이 버텨 온 산티아고다. 이번에도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끊임없이, 삶이 끝날 때까지.
청새치를 먹어치운 상어는 여전히 바다에 있다. 우리에게 아직 맞설 힘이 남았기를. 혹은 다시 바다로 나갈 용기가 남아 있기를.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오늘 밤 산티아고가 깊은 잠이 들기를 바라며, 오늘은 청새치 대신 대방어라도 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