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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Dec 22. 2022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문을 열자 축축하고 어둡고 차가운 냄새가 밀려온다. 천장에서 시작된 짙고 검은 얼룩 곰팡이들이 동서남북 아랫마을로 빠르게 진격 중이다. 그 무늬 하나하나가 같은 것이 없다. 프레스코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땅속으로 반쯤 잠긴 창문을 통과한 희미한 빛은 한쪽 벽 언저리에만 머물러 있고 현관문과 바로 연결된 복도 겸 거실에는 꼬마 둘이 배를 깔고 있다. 작은 꼬마는 대략 세 살, 큰 녀석은 많아야 예닐곱 먹었을 것 같다. 너덜거리는 흰 종이 위에 그림 같은 것을 끄적이는 모양이다. 이쪽 시선에서는 천장의 그것과 흡사한데, 꼬마들의 눈빛이 비장한 걸 보면 아담의 탄생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바닥에 깔린 이불과 그 위의 전기장판에 비스듬히 누운 아이가 아담 본인이든지.     


“아빠는 어디 가셨니?”

“……”

“아빠 어디 계시니?”

“……”

잠깐 고개를 들었던 아이들은 다시 예의 창조작업으로 돌아간다. 아이들 옆에는 개다리소반 하나가 덩그러니 있고, 그 위에 비닐을 뜯지 않은 소보로빵, 단팥빵이 각각 두 개씩, 그리고 봉지가 열린 삼양라면 하나가 있다. 상위에는 라면 수프가루가 흩어져서 말라붙어있다.

방문이 하나뿐이다.

“아빠 방에 계시니?”

큰 녀석이 고개를 흔든다.

“아빠 언제 오시니?”

작은 녀석이 고개를 젓는다.

바닥에 온기가 있는 거로 봐서 가스가 끊기지는 않았나 보다. 빵이 떨어질 때쯤 아비란 자가 나타날 것이다.

지난밤 내린 눈 쌓인 거리보다도 어두운 집에서 나오며 나는 남겨진 아이들보다, 모습을 감춘 남자 생각에 이를 갈았다.          



아이들의 아비는 재개발구역의 세입자다. 아내는 없고 남자아이 둘을 데리고 산다. 직업은 딱히 없다. 간간이 막노동하고 자주 술을 마신다고 한다. 20대 후반에 아이 둘을 키우는 걸 보면 일찍 결혼한 것인데, 결혼에 빠름과 늦음의 기준은 상대적일 것이기에 이를 확정할 수는 없다.


남자는 요즘 나를 피해 다닌다. 법에서 정한 이주 기간이 이미 지났고, 강제집행 예고문을 알렸으며, 이에 남자도 이사 날짜를 약속했는데, 번번이 날짜를 미루다가 급기야 도망을 다니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이사할 여건이 안 되는 것이다.     


며칠 후 드디어 남자를 만났다.

“아니, 이게 계속 피한다고 될 일이에요?”

“저기 피한 게 아니고……. 돈을 좀 마련해 보려고…….”

“지금이라도 강제집행이 가능한 건 알고 있죠? 아니, 애들도 있는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쫓겨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예요?”

“…….”

“그래서 이사할 집은 알아보기는 한 겁니까?”

“…….”

“보증금하고 조합에서 주는 이사비까지 하면 얼마나 되는 거예요? 그 정도면 작은 방 하나는 구할 수 있잖아요?”

“그게 저, 제가 허리를 다쳐서 일을 못 하는 통에 보증금을 거의 다 까먹었어요. 죄송합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를 푹 숙이는 남자다. 답답한 건 그를 보는 사람의 몫이다. 협상에서는 먼저 조바심을 내는 쪽이 늘 불리한 법. 공사지연이 더 큰 부담이 되는 상황에서 이미 약자는 정해져 있었다.

“얼마나 있어야 이사할 수 있는데요?”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술 사이로 긴 숨을 마신다.

“쓰으으으읍, 그게 한 삼백 정도만 있으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주택 재개발정비사업조합에는 예비비라는 지출항목이 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쓰기 위한 돈이다. 혹은 답이 안 나올 때 답을 내어줄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며칠 후에 그에게 삼백만 원을 주었다. 이사비로 나온 비용까지 합하면 육백만 원. 넓고 편한 집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이지만, 변두리 쪽에 월세방 한 칸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를 떠난다 해도 남자의 가난이 사라지지 않을 게 뻔하지만, 지금보다는 나아지기를. 부디 그렇기를 바랐다.          



다시 찾은 곰팡이 왕국에는 사내아이 둘 뿐이다. 대승을 거둔 곰팡이 군대는 벽의 절반이나 점령한 상태다. 빵이 놓여 있어야 할 개다리소반은 배를 뒤집고 누워있다. 방바닥에 온기라곤 없다. 아이 둘이 부둥켜안고 있다.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끝맺지 못 한 그림들만 바닥에 삐뚤빼뚤 놓여 있다. 아무래도 미완으로 남을 것 같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동굴의 짙고 무거운 어둠이, 너무나 고요해서 질식할 것 같은 무겁고 무서운 침묵만이, 저 더럽고 검은 곰팡이 왕국으로부터 끝없이 밀려온다. 눈치 없는 찬바람이 덩달아 방 안으로 쏟아진다.          


일주일 후에, 한 유흥가를 배회하는 아이들의 아비가 목격되었다. 어떤 젊은 아가씨와 함께였다. 그가 알코올 중독자였을까. 잘 모르겠다. 모처럼 생긴 목돈이 그의 숨겨진 욕망을 자극했을 수도 있겠지. 머리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중독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을까. 이사비를 들고 집을 나간 그를 붙잡고 뭐라 하는지 들어나 보고 싶었지만, 다시 그를 볼 수는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끝내 아이들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흔든 것이 중독인지, 가난인지는 몰라도 그가 자식들을 위태롭게 한 것은 분명했다.


아이들은 시골에 사는 그처럼 가난한 할머니가 데려갔다. 그의 얼마 안 되는 세간살이는 강제로 보관소에 옮겨졌다. 그가 찾아가지 않으면 쓰레기가 될 것이다. 나는 그를 믿은 죄로-그의 주거지를 옮기지 못하고 삼백만 원만 탕진한 죄- 몇 장의 반성문을 썼다. 걱정할 건 없다. 어릴 때부터 무수하게 써봤던 것이 반성문이니까. 물 흐르는듯한 문장을 읽은 이가 감복했을지 또 누가 아는가.          



텅 빈 두 꼬마의 집, 이제는 곰팡이들의 집을 본다. 사람이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장판이 일어나고 벽지가 너덜거린다.

아이들이 남기고 간 미완성의 그림 한 장이 바닥에 뒹군다. 작은 아이가 그렸을 법한, 흰 종이를 동그라미로 가득 채운 그림이다. 언뜻 보면 동그라미가 너무 어지럽게 겹쳐있어서 곰팡이를 그린 건가 했는데, 가만 보니 굵은 선으로 동그란 얼굴 네 개, 동그란 몸 네 개, 팔도 다리도 동그랗게 그렸고, 동그란 얼굴 주위에는 더 작은 동그라미로 머리 모양까지 표현해 놓았다. 같은 내용을 한 장의 종이에 반복해서 그리는 통에 선이 복잡해졌을 뿐 실상은 한 가지 내용이었다.      


‘엄마, 아빠, 형아, 나’

‘엄마, 아빠, 형아, 나’

‘엄마, 아빠, 형아, 나’     


아이가 배를 깔고 누웠던 자리에 그림을 내려놓았다.

서너 살 먹은 아기가 매일 덧칠해가며 그린 가족은 여전히 그림 속에서 동그란 얼굴로 동그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이 도시도 마치 사람의 인생처럼 태어나고 늙고 죽어간다. 그러고는 다시 태어난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어제오늘의 일만도 아니다. 미래에도 도시재생은 계속될 것이니까. 그렇기에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 원주민과 조합과 건설업자가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개발을,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지고 마는 도시개발을, 엉뚱한 자가 돈을 버는 현재의 도시재생방법을 바꾸지 않는 한, 멋들어지게 높은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눈이 오기 전에는 하늘이 어두워진다지, 조금만 어두워졌다가 이내 가볍고 하얀 눈들이 좁고 낮은 지붕 위로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내려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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