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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Mar 17. 2023

무너지는 일은 기쁜 소식일 뿐

If something can go wrong, It will

일주일 사이 5층 지상 건물을 모두 해체했다. 30년을 버텨왔던 건물이다. 인근 주민들이 와아! 탄성을 지른다. 먼지와 소음, 그리고 진동이 덜하겠지 안심하는 눈치다. 하지만 사실, 철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하층을 철거하는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애를 먹이는 법이다.


지상 5층 지하 1층의 옛 아파트는 '가로정비사업'이란 명목으로 철거되고 17층의 고층 아파트로 바뀔 예정이다.

짓는 것만큼이나 부수는 일 또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쩌면 해체과정이 새 건물을 짓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신축현장보다 철거현장에 민원이 더 많은 이유겠지.  

굴착기 기사의 호출이다.

"여기 그냥 기초만 있는 게 아니라 파일이 많이 박혀 있는데요. 어쩌죠?"

-파일은 땅을 튼튼하게 할 목적으로 기초와 함께 땅속 깊이 설치한 콘크리트 기둥이다.


공사기한이 촉박한 현장이다. 코앞에 위치한 고등학교 때문인데, 개학 전까지 건물붕괴를 약속한 터다. 기초 아래 깊숙이 박힌 파일을 일일이 제거한다면 약속한 일정을 맞추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 진행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일단 파일은 두고 기초판만 뜯어내야죠. 저것까지 뽑으려면 개학 전까지는 어림도 없어요."

"끌어올려보고 끊어진다면 그건 그냥 놔두고 진행합시다. 일단 잔해물로 덮어두고 토목 애들이 오면 알아서 하라죠. 뭐."

"그래도 파묻고 지나가면 나중에 덮어둔 흙을 다시 퍼내고 파일 작업까지 해야 하는데, 두 번 일 하느니 이참에 다 뽑아냅시다."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이 말도 저 말도 다 그럴듯하다.  

두툼한 기초판 아래 굵은 콘크리트 기둥들, 30년 동안 아파트를 지탱해 온,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민들의 일상을 지지해 주었던 그 기둥들도 빼꼼 고개를 내밀고 우리 회의 결과를 주시하고 있었다.



건설기술인 품질관리 교육을 받는 중이다. 온라인 교육인데, 일하는 틈틈이 듣고 있다. 어느 교수님의 강의 중에 화면을 멈췄다. 강의 주제를 소개한 문장, If Something Can Go Wrong, It Will.

처음 들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꼭 내게 들려주는 문장 같았다. 어쩌면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기둥을 걷어내기 위해 판 구멍이 언젠가 뉴스에서 접했던 커다란 씽크홀처럼 휑하다. 파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 대략 80개는 넘을 것 같다.

일정이 며칠 늦어질 것이다. 중장비에 들어가는 돈만 천만 원을 넘길 것이고 회사에서 반성문을 요구할지도 모를 일 - 하지만 아시다시피 반성문 작성에는 도가 트였으므로 걱정들 마시라.  


이제 묵은 기둥을 꺼내서 잘게 부숴야 한다. 그들은 새 콘크리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들이 있던 자리는 쌩쌩한 기둥들이 대신하겠지.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말이 진짜라는 걸 실감한다. 이별에도 만남에도 너무 슬퍼하거나 호들갑으로 기뻐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파일을 남겨두고 공사를 진행했다면, 기간은 맞출 수 있었겠지만 다음 공정인 토목팀에서는 지금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잘못될 수 있는 일은 언젠가 잘못된다. 귀찮아도, 힘들어도 정확한 방향을 향해야 한다. 조금 느린 것이, 잘못돼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일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니 혹 그런 독자가 있다면 서운해하기 없기- 나이 들수록 이쪽저쪽 입장이 다 보여서 너스레를 놓습니다. 나이 들면 말이 많아진다는 말은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건물을 해체하고 새 건물이 들어서는 재개발현장에서 보니 도시 재생 또한 사람의 일생과 다르지 않은 듯싶다. 원주민과 조합의 다툼을 보고, 현장 주변 거주민의 고충을 듣고, 용역깡패라고 오해받는 철거회사 근로자의 처진 어깨도 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근처를 지날 때면 새 아파트에 입주한 젊은 부부의 환한 얼굴을 본다. 몸을 숨긴 꼬마새들의 노래와 허리까지 치마를 끌어올려 미니스커트로 변한 교복을 입고 까르르 웃는 여학생의 재잘거림을 듣는다.

더 이상 비산먼지도 소음도 진동도 없다. 하지만 다른 개발현장에서는 오래된 건물이 무너지고 또 다른 현장에서는 항공사진을 바꾸는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있을 것이다.

산소를 운반하는 혈색소처럼 도로에는 자동차가 쉼 없이 사람들을 나른다.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찾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면 도시가 박동을 시작한다.

우리를 품은 이 도시는 또렷하게 숨을 내쉬고 있다.


무너지는 일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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