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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Mar 31. 2023

실패했지만, 너는 나의 킹메이커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돼."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두레박에 담긴 물처럼 일렁인다. 그러고는 윗니를 드러내며 삐죽 내민 아랫입술을 깨문다. 그녀가 뭔가 골몰히 생각할 때 보이는 행동이다. 앞에 선 남자애는 애꿎은 땅만 차대고 있다. 그저 눈만 껌뻑이고 있는 녀석이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경상남도의 남해라는 작은 섬에 있는, 섬과 같은 이름의 초등학교에서 제일 예뻤고,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약국집 딸로서 동화책에 나오는 옷을 입고 다녔으며, 1학년 때부터 여자 반장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에서 말을 제일 똑 부러지게 할 줄 아는 능력자였다.      


늘 주위에 여자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그녀였기에 숫기 없는 남자애가 먼저 말을 걸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남자애는 소녀의 눈에 들어보려고 노력하기는 했는데, 그 애쓴다는 일이 가끔 그녀들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다리에 검정 고무줄을 감고 평행한 두 줄을 만든 다음 깡충거리며 고무줄 넘는 놀이를 할 때 살금살금 다가가서 고무줄을 땡강 끊고 도망가는 것이다. 그녀가 새치름한 눈빛을 쏘아대며 쫓아오는 것만으로도 기쁜 남자애였다.     


한 날에 소녀가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을 때, 어김없이 남자애는 몸을 숨기고 있었다. 소녀는 하늘하늘 발재간을 부리며 고무줄을 넘고 있었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사는 우리 삼천만…….

놀던 아이들도 함께 노래했다. 노래가 절정에 도달했을 즈음 남자애가 후다닥 달려와서는 가위로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쳤다. 이번에도 소녀가 쫓아와 줄 거란 기대를 하면서.

하지만, 남자애의 생각과는 달리 소녀는 약만 오른 모양이다. 그 자리에 털썩 쭈그리고 앉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것이 아닌가. 한 손에 고무줄을 들고 도망가던 남자애도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된 채 소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로 미동도 없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남자애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녀에게로 향했다.     

"저기……. 야, 우냐? 뭐 이런 거로 우냐?"

남자애는 잘린 고무줄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소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남자애 코앞에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그 때문에 남자애는 두어 걸음 황급히 물러났다.

"울긴 누가 울어? 네가 어떡하는지 알아보려고 그런 거야. 그 덕에 이렇게 너를 잡았고 말이지."

소녀의 얼굴은 울기는커녕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남자애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소년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너, 근데 보니까 다른 여자애들이 고무줄 할 때는 가만있더니 왜 내 고무줄만 자꾸 잘라가니?"

"......"

"너어, 나 좋아해?"

"아니다. 가시나야. 내가 와 니를 좋아하노?"

"호호. 너 왜 갑자기 사투리 쓰냐?"     

"......"

소녀는 남자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고 남자애는 못 이기는 척 수락을 했다.

그날 이후로 남자애는 소녀가 고무줄놀이할 때 그 옆에서 다른 녀석들이 그녀의 고무줄을 끊지 못하도록 지켜야 했다.          



5학년에 올라가서도 남자애는 소녀와 같은 반이었다. 

학기 초에 반장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소녀가 남자애를 복도로 불러냈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알았지?"     

올해도 그녀는 여자 반장이 될 것이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그녀는 남자애를 자신과 비슷한 위치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여자애들이 우리를 보며 키득거리며 지나갔다. 소녀가 아이들에게 손가락 한 개를 세워 보였고 지나는 여자아이들도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애는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애로 말할 것 같으면 할머니 손에서 응석받이로 자랐는데, 엄마 또한 자연 방목을 지향한지라 학교에 들어갈 때 딱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을 정도의 교육 수준이었고, 들과 산에서 뛰노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여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공부하는 자체를 싫어했으며, 주의가 산만하여 잠시도 한 가지 일에 집중을 못 하였던 것이다.


"이미 내가 다 준비해 두었으니 넌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된다. 알았지? 나 너랑 꼭 같이 반장 하고 싶단 말이야. 알았지?"

이번에도 남자애는 새까만 눈동자를 껌뻑거리는 소녀에게 그만 넘어가 버렸다.     


담임 선생님이 반장 후보자를 추천하라고 했다. 

"성윤이요." 

성윤이는 4학년 때도 반장이었던 녀석인데, 성윤이 가방을 들어주고 사탕도 얻어먹던 녀석이 잽싸게 1등으로 손을 들었다. 성윤이가 녀석을 툭 치며 웃었다. 

"경희요." 

소녀의 친구가 2등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더 추천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이 주위를 쭉 둘러보더니 더 없냐고 물었다.

"더 추천이 없다면 투표할 필요도 없겠는데, 성윤이나 경희는 계속 반장을 해왔던 친구들이니까 이번에도 맡겨도 되겠지?"

그때였다.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욱이요."

"누구? 누구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선생님이었다.

다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욱이요."     

남자아이들이 웃었다. 반장 후보인 성윤이도 함께 웃었는데, 남자애가 나름대로 인상을 써봤지만, 녀석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선생님이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모은 투표용지를 교탁에 쏟았다. 남자 반장, 여자 반장을 각각 뽑는 선거였기에 여자 반장은 소녀로 확정되었다. 대표로 소녀가 앞에 나가 성윤이와 남자애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남자애도 지고 싶지 않아서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최소한 경희는 날 뽑았을 테고 두 표는 나오겠지. 그럼 됐지. 뭐.'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아이들에게 꼭 창피를 당할 것만 같아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성윤이 표가 쭉쭉 늘었다. 가끔 남자애 이름도 나왔지만 투표용지 30개를 발표했을 때 벌써 20표 차이나 벌어졌다. 화끈거리는 얼굴 때문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곁눈질로 칠판 앞에 선 그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그때 투표용지를 펴던 선생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재욱이……, 재욱이……, 재욱이…….

남자애의 이름이 끝없이 나왔다. 성윤이 표가 한두 번 나왔지만 그게 다였다. 남자애의 이름 밑으로 바를 정자가 길게 생겼다. 

남자애 35: 성윤 25. 

항상 반장만 하던 성윤이가 남자애를 돌아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자애들이 손뼉을 쳤고 남자애들이 야유를 보냈다.     


선생님이 긴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건 누가 장난을 친 것 같은데, 1년 동안 우리 반을 맡길 사람을 뽑는 일에 장난을 쳐서는 안 되겠지." 

한동안 말없이 학생들을 둘러보던 선생님이 교실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전부 눈을 감아. 아무도 눈을 떠서는 안 돼. 주임 선생님과 상의했는데, 투표를 다시 하기로 했어."

남자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 우리가 공정하게 투표를 했는데, 다시 하는 이유가 뭐예요. 이건 말이 안 돼요."

경희가 선생님에게 따져 물었다. 경희와 가끔 놀러 갔던 장평저수지에 퍼지는 물결처럼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선생님이 두어 번 손바닥으로 교탁을 내려치자 파장은 잠잠해졌다.     


선생님은 아이들 눈을 감긴 다음, 성윤이를 선택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남자아이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재욱이를 선택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는데, 여자아이들 대부분 손을 들지 않았다. 경희 혼자 칠판 앞에서 손을 들고 있었다.               


"치, 이런 게 도대체 어딨어. 선거를 두 번이나 하는 게 말이나 돼?"

경희가 분통을 터트렸다. 남자애도 억울한 표정이었지만 뭘 어떻게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경희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왜 가만있는 사람을 부추겨서는 이런 창피를 당하게 한단 말인가.

"네 계획이란 게 여자아이들과 작당해서 사람 창피 주는 거였냐?"

나도 모르게 경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경희도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리다가 다시 다물었다. 입술만 옴짝거렸다. 그러더니 코를 씩씩거리며 남자애를 노려봤다.

"난…… 그냥…… 너하고 같이 반장 하고 싶었던 말이야.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건데?"

그러더니 막 울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애는 눈물에 약한 것 같다.

"가…… 가시나야…… 누가 화를 냈다고……."

"지금 막 소리 지르고 화냈잖아. 나한테……. 흑흑흑"

경희는 한참을 울었고 나는 한동안 그녀 앞에서 벌을 서야 했다.          



엄마에게 잠시 반장이 되었고 끝내 반장에서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엄마는 별 반응이 없었다. 같은 학교 전교 회장이던 누나에게 다시 보고했다. 누나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화를 냈고, 다음날 교무실에 가서 항의했지만, 성윤이는 반장직을 유지했다. 

성윤이 부모님이 평소 구경하기도 힘든 과자를 사 들고 교실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경희와 나만 그 과자를 먹지 않았다.     

경희는 반장직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했는데, 경희의 엄마가 학교에 다녀간 이후 선언을 철회했다. 누나는 포기하지 않고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항소했고, 결국 선생님은 내게 부 반장직을 제안했는데, 나는 수락하지 않았다.               


"부반장이라도 하면 좋잖아. 왜 안 한다고 해?"

"가시나. 니, 한 번만 더 이런 일 벌이면……."

"벌이면 뭐? 그러면 어쩔 건데?"

"암튼 다시는 뭐 만들어보겠다고 나서지 마라. 알았냐?"

"치, 웃겨. 난 너를 반장 꼭 만들 거야. 내년에 두고 보라지."      


콧방귀를 뀌며 혀를 내미는 경희 뒤로 수천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파닥였다. 

들판과 수면을 물들인 노을 속에서 태어난 수만 개의 작은 빛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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