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싹 마른나무 사이에 놓인 종이상자, 중대장이 검지를 까닥거렸다. 가져와 보란 뜻이다. 참호 근처에 버려진 삼양라면 상자를 번쩍 들어 올리자 밑을 받치고 있던 종이가 아래로 꺼지며 뭔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흰 천에 돌돌 말린 그것을 본 사병들은 모두 작은 인형 같다고 했다.
이십 대 후반의 중대장이 챙이 동그랗게 말린 모자를 벗으며 다가왔다. 크라운에는 다이아몬드 세 개가 흰색 실로 새겨져 있었다. 꺾은 나뭇가지로 그가 작은 인형을 쑤석거렸다. 인형의 얼굴을 본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 뼘을 조금 넘길 것 같은 인형의 피부색은 파란 요정, 스머프 같았는데, 중대장이 흰 천을 막대기로 걷어내자 우리 부대원 모두는 금세 그것이 작은 인형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동계훈련 중이었다. 산길을 따라 지나가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왜 나서서 뭔가 수상한 상자가 있다가 보고하고, 왜 상자를 집어 올리는 일을 자처했으며 발아래에 작은 주검을 나뒹굴게 한 것인지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곧 전역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인제 와서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등에 큼직한 무전 장비를 짊어진 통신병이 중대장 곁으로 나섰다. 중대장은 말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병사들은 어느새 저만큼 물러난 채 웅성거렸다. 나는 중대에서 최고 선임자였기에 그들처럼 물러날 수도 그 자리를 지킬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길 위로 솟은 죄 없는 나무뿌리만 차대고 있었다.
키 큰 소나무 사이로 산 아래 자리 잡은 넓은 공장 지대가 보였다. 높은 굴뚝에서 흰 연기가 오르고 있었고 사람들의 모습이 좁쌀처럼 보였는데, 움직임이 없어 벽에 걸린 그림 같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말 없는 중대장 옆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눈길이 자꾸 흰 포대기로 향했다.
“그냥 묻어주자.” 중대장이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네? 신고 안 하고요?”
“고 상병! 여기 공장단지가 몇 갠 줄 몰라서 묻냐? 신고한다고 누가 버리고 간 건지 찾을 수나 있을 거 같아?”
“그래도…….”
“괜히 경찰서에 불려 다니기만 할 거야. 그냥 일 귀찮게 만들지 말자. 이건 명령이다, 묻어주고 와라.” 그가 모자를 고쳐 쓰며 등을 휙 돌렸다.
아기를 쳐다봤다. TV에서 보던 신생아보다도 훨씬 작았다. 중대장이 망가진 상자 밑부분을 지그재그로 겹쳐 빠지지 않게 한 후 돌돌 말린 천을 상자에 담아주었다. 상자 윗부분까지 덮은 그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턱을 까딱거렸다.
좀 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확 밀려왔다. 도저히 혼자서는 못 할 것 같았다. 나는 탄약통을 드는 부사수를 불렀다.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친 녀석이었지만, 선택지는 정해진 것이었다. 중대장의 재촉에 녀석은 엉거주춤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수와 부사수로 만난 우리는 M60 총과 탄약통 대신에 삼양라면 상자를 양쪽에서 들고 양지바른 곳을 찾아다녔다. 또 빠질 것 같아 한 손으로 밑을 받친 채 느릿느릿 움직인 탓에 중대장과 다른 병사들은 이미 하산을 시작한 상태였다. 둘밖에 남지 않게 되자 우리는 더 말이 없어졌다. 어서 이 일이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오래된 소나무 아래 풍광이 확 트인 곳을 발견했다. 햇볕도 잘 드는 곳이었다. 우리는 상자를 내려놓고 야전삽을 들었다. 하지만 땅은 쉽게 파지지 않았다. 삽을 찔러 넣을 때마다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마치 그 소리가 계곡을 따라 마을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거기에 조금 땅을 파자 실핏줄처럼 퍼진 뿌리가 삽에 걸려서 일은 더디기만 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우리는 온몸이 땀으로 젖은 후에야 겨우 상자가 들어갈 만한 땅을 팔 수 있었다.
녀석과 한쪽씩을 잡고 상자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만 상자 아래쪽이 찢어져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느껴졌고 천은 바람결에 뒤집히며 떨어지는 낙엽처럼 펄럭이며 구덩이로 들어갔다. 우리는 빈 상자를 들고 얼어붙은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녀석이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더 긴 숨을 내뱉었다.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 작은 몸을 라면 상자에 넣고 땅에 파묻다니,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작은 주검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두려움보다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삐삐로 연락하던 시절, 더군다나 여긴 군대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뭇가지 두 개를 꺾었다. 말라붙은 칡넝쿨로 나무를 엇갈려놓고 십자가 모양으로 꽁꽁 묶었다. 작은 몸만큼이나 낮은 무덤 앞에 십자가를 세워두고 작은 영혼이 어디 길 잃지 말고 잘 돌아가기를 빌고 빌었다.
먼 산에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나무 사이 어디엔가 산 비둘기가 다섯 음절로 쉼 없이 울고 있었다.
제대하기 전 산불 예방 작업을 위해 근처를 지난 적이 있었다. 파랗게 새순이 돋아난 산은 낮고 작은 동산쯤은 어렵지 않게 감춰버렸고 다시는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봄이 되고 나는 전역을 했다. 한 번씩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월이 지날수록 아기의 얼굴은 엷어지기는커녕, 3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아기가 된 노인들의 마지막을 지킬 때였다.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의 죽음 앞에서 이상하게 그 작은 얼굴이 생각났다. 한 노인이 내게 마지막 미소를 건넸을 때였다.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작고 푸른 스머프 요정이 떠올랐고 어쩐지 녀석의 표정이 웃는 것만 같았다.
‘명령 불복종으로 혼이 나더라도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널 그렇게 보내서 미안하구나.
그때 천을 벗기고 네가 남자인지 여자 아기인지 확인이라도 할 걸 그랬어.
아가! 네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널 잊지 않을게. 죽을 때까지 널 기억할게.
딱 하루 만났지만, 널 사랑해.’
가끔 산에서 멧비둘기 소리가 들리면 먼 산을 보게 되는데, 노을이라도 지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두 눈이 뜨거워진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어떠한 조건 없이.
하지만 이 당연한 일이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경찰청 자료(2019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영아 유기는 1272건, 영아 살해는 110건이 발생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갓 태어난 아기가 살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