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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궁은정 WiseFrame Jan 09. 2019

푼돈 소비 말고, 목돈 투자하기

엄마인 나에게

한 달에 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돈은 얼마일까? 예전에는 내가 벌면 그 돈을 내가 다 써도 되었다. 물론 대부분이 생활을 하는데 쓰였지만, 아르바이트를 더 해서 추가로 돈이 들어오면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영화를 봐도 되고, 책을 사도 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어 보고, 여행도 좀 다니고. 소소하게 나를 위해서 쓸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난 지금은 어디까지 내가 써도 되는 돈이고, 어디까지 아껴서 다른 데 써야 하는 돈인지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 나도 조금씩 벌기는 하지만 남편이 주된 수입을 가져오고, 미래가 무궁무지한 아이들에게 돈을 쓰는 것이 더 가성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나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줄여도 괜찮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예전에 엄마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돈을 아끼고 자신의 모습은 돌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왜 그럴까?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판에 들어오고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움직여지게 된다. 절대적인 수입의 액수가 적었던 그 때는 더 엄마 자신에게 쓸 수 있는 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원하는 것이 있다. 참다 참다 더 이상 안 되겠던 엄마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몇 시간 뒤 돌아온 엄마의 머리는 뽀글뽀글 해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한 숨 돌리면 또 아끼고 아껴서 살림하고 집안일 하고 아이들 뒷바라지 했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나고 말이다. 


지금은 무려 21세기의 대한민국. 빈곤이 해결되고 OECD 국가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잘 사는 나라에 살게 된 지금. 아줌마들은 여전히 자신을 위해서 돈을 써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액수의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인 돈을 마련하는 것과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경제양극화의 문제이다. 다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어 들였는데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잘 쓸 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엄마들이 무언가 해보고 싶은데 도전을 해 볼 수 없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고 한다. 그냥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돈이 들어간다. 나와서 밥이나 빵 사 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는데 돈이 든다. 하지만 이 돈은 생활비에 해당되는 돈이고, 한 번에 지급하는 돈이 작고, 눈에 띄지 않는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쓰는 돈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와 만나서 함께 쓰는 비용이기 때문에 돈을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나를 위해 무언가를 배운다거나 체력이나 외모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쓰는 돈은 유독 크게 보이고, 사치스럽게 보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돈을 쓰려고 하면 이런 목소리가 귀에서 쟁쟁 울려댄다. ‘그 돈을 아끼면 아이들 학원비로 쓸 수 있잖아.’,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걸 한 번 더 먹을 수 있는데…’, ‘집 사는데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는데…’, ‘돈 안되는 짓은 하지 마라’, ‘이렇게까지 해서 뭐하니…’

도대체 누가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부정적인 말이 무더기로 끌려 올라와 무언가 시도를 하는 것을 방해한다. 큰 마음을 먹고 돈을 투자해서 무언가를 해도 금새 이런 말들이 속에서 울려 퍼져 발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을 더듬어 올라가면 이 여러 가지 말의 뼈대가 되는 말은 이것인 것 같다. 


‘너는 이 만한 돈을 쓸 자격이 없어.’


이 생각은 무엇 때문일까? 돈은 번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아이를 양육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는 일은 어쨋든 돈을 버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당하게 몫을 요구하기가 힘든 것이다. 요구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얼마까지가 정당한 몫인지 산출하기도 어렵고 말이다. 이것은 집에 있는 사람은 하는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요즘에는 그래도 살림을 하는 것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집안일은 소모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지고, 그래서 다른 일보다 후순위로 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어찌 가치를 인정받아 계산한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으로는 스스로 돈을 벌어올 수 없다는 생각이 돈을 주도적으로 쓰지 못하도록 위축시킨다. 


또 엄마 자신에게 쓰는 돈은 투자가 아니라 오로지 소비라고 생각하면 쓸 자격이 없게 느껴진다. 남편이 쓰는 돈은 다시 돈을 잘 벌어올 수 있도록 하는 에너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댈 수 있고, 아이들의 교육비는 미래의 자립을 위해서 정당하게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아이들에게는 비싼 장난감이나 별로 읽지도 않을 전집을 사주는 데 엄청난 돈을 쏟아 부으면서, 엄마에게는 잔돈만이 주어진다. 유독 엄마가 쓰는 돈만 흔적없이 사라진다고만 생각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엄마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 이 돈이 단순 소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돈을 쓰는데 크게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투자가 아니라 단순 소비라도 그렇다. 왜 엄마는 돈을 쓰고 누릴 수 없는 존재인가. 왜 다른 가족구성원이 다 쓰고 남은 부분을 차지해야 하는가. 으레 그렇듯이, 남은 시간에 뭘 해야지, 돈이 남으면 뭘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남은 시간과 돈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어떤 일이 진짜 돌아가게 하려면 시간과 돈을 미리 배정 해 놓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 엄마 몫은 엄마의 몫으로 배정해 놓아야, 그 안에서 투자를 하든 소비를 하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배정하는 기준은 벌이의 정도도 아니고, 가성비나 투자대비 회수율로 따지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다. 


한 번 지나간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들 다 키우고 나서 무언가 해보겠다는 소망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나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게 된다. 인맥도 다 끊기고, 일하는 법도 무뎌지고, 지식도 예전의 것이 된다. 해왔던 것을 계속 이어나가 업데이트하는 것은 쉽지만, 그동안 완전히 손놓고 있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게다가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는데에는 많은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다행인 것은 주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삶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집안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이를 돌보면서, 아무런 인정도 받지 않지만 그래도 꿋꿋이 여러 일을 해내면서 저력이 생긴다. 이것은 비용으로 아무리 계산해보려고 해도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만 만족을 하면 잠재력을 가지고만 있지, 그것을 터뜨릴 수 없다. 원석도 땅 속에 파묻혀 있으면 가치를 발현하기가 힘들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잠만 재우지 말고, 활용하고 전하고 나누어서 더 큰 가치가 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약간의 훈련과 세공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돈을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엄마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푼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목돈을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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