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이 뛰어들고 폭발 성장을 했던 옛날을 떠올리며...
대학원에 들어가고 나서, 학기마다 개최되는 논문 공개발표에 참석한 적이 있다. 석사 1기가 보았을 때, 앞자리에 나가서 자신이 쓴 내용을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멋졌다. 교수들에게 지적질을 당하는 그것조차도 멋져 보였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자료의 두께가 내 마음을 참으로 설레게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사실 이전까지는 A4지 10매 이상의 글은 쓸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도 계속 글을 썼었지만, 거의 학교 리포트나 신문, 잡지 기사였기 때문에, 아주 호흡이 긴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이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나 혼자 하려니 잘 되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그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보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수업을 같이 듣는 '아는 언니', '아는 오빠'가 그런 두께의 글을 써냈던 것이다. 이 코스를 밟으면 나도 그 두께의 글을 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때는 글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그 분량 만으로도 감동을 ‘먹었다.’
그때는 겁이 참으로 없었던 것 같다. 그 두께를 보면서, ‘나는 쓸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들이 학회에 발표하고, 학회지에 투고를 하는 걸 보면서도, ‘어떻게 저걸 할 수 있지?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아.’라는 마음을 거의 먹어본 적이 없었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그 생각이 정말 건방진 생각이 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보자가 논문을 처음 써내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노력만 조금 하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사람에서 지식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어내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전에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사람이 아니라 지면에 실어서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경험이 있었다.
문화일보 학생 기자일 때, 크게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신문사 선배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었다. 그래서 조금 우쭐했었다. 그 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데 어떤 분이 계단에 서서 신문 지면을 넓게 펴고 서서 내 기사를 읽고 있었다. 속으로 ‘그거 제가 쓴 거예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독자가 내 기사를 유심히 읽고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경험은 두고두고 나에게 자신감과 충만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칭찬을 해준 것도 아니고 그가 내 얼굴을 알아본 것도 아니지만, 그저 그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꽤 의미심장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기사를 쓰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열심히 쓴 기사가 그다음 날이면 휴지조각으로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사건의 단발적인 모습을 브리핑하는 형식이어서, 세상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력을 얻고 싶다는 욕심을 채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제대로 된 깊이 있는 기사를 써 본 적이 없어서 생긴 오해일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심도 있는 기사, 파급력이 있는 기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정교하고 천천히 써 내려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 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논문이었다.
논문은 기본적으로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논증해 나가는 체계적인 과정이다. 물론 여러 데이터와 문헌, 수동적인 문장으로 ‘이 건 내 생각이 아니고, 객관적인 결과야’라고 말하지만, 결국 연구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는 관점을 통해 천천히 대상을 탐색하면서 아귀를 맞춰가는 과정은 꽤나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하고 나면 정말 ‘해냈다’는 그런 느낌이 든다.
아마도 내가 처음부터 논문을 눈 앞에 마주했다면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이전에 한 두 페이지씩 글을 완성해 본 경험, 그 글을 평가받아본 경험이 알게 모르게 다져져서 더 큰 일에 도전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에 보이는 결과 뒤에는 작은 성공과 습관이 배어 있는 듯하다. 두려움이 아닌 설렘으로 내 가슴을 두드렸던 나 만의 도전 과제는 갑자기 다가온 것이 아니라, 서서히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늘 보이지 않는 것, 상관이 없는 것에서 시작하는 작은 실천이 모이면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능력이다.
나는 이제 논문은 쓰지 않는다. 나는 책을 쓰기로 했다. 아마 짧은 논문을 써낸 것은 책을 쓰기 위한 또 하나의 작은 노력과 성취였던 듯 싶다. 그리고 첫 책은 그리 신통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작을 하지 않으면, 그 미약한 시작을 하지 않으면 이후의 진전도 없을 것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설픈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는다. 그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큰 물이 될 것을 꿈꾸면서. 두렵기보다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