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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궁은정 WiseFrame Nov 02. 2019

엄마, 보내드리기

한 때는 온 우주였던 한 존재를 마음에서 떠나보낸다는 것

관계와 관련해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해야 해서, 목차에 올려놓았다. 여자가 자신의 꿈을 향해 나가는데 엄마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때는 온 우주였고, 내 삶의 롤 모델, 내게 생을 부여한 절대적 존재였던 엄마. 아쉽지만 그분을 마음속에서 잘 보내드려야 한다. 엄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의 기대와 바람 때문에, 나의 길이 휘둘리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단순히 엄마의 영향을 받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로 건강한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업이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데, 정작 이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아서 이 주제를 지워버릴까 말까 수 십 번을 고민했다. 내가 엄마에 대해 떠올리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은, 따뜻한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엄마가 얼마나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었는지 쓰고, 함께 했었던 추억을 적는 것이다. 그리고 고마움을 전달하는 훈훈한 결말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엄마를 좋게 표현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쁘게도 표현할 수도 없다. 사실은 부모님과 나는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별 소식이 없으면 잘 지내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 우울한 기분을 많이 느꼈었다. 그것이 우리 집이 가난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으니까 두 분은 여유 없이 바쁘게 일했고, 그래서 자식을 잘 챙길 시간이 없었다. 학력도 거의 없으셔서,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셨다. 당장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고, 밥 먹이고 입혀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 책을 읽다 보니까, 가난한 부모라고 다 아이들을 무심하게 키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우리를 잘 챙겨주시고 다정하게 대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조차도 잘 의식하지 못했다.’는 식의 서술을 보고는 이러한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 가서 무얼 했는지,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친구는 누구를 사귀는지 거의 물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를 해준다거나, 숙제를 도와준 적이 거의 없다. 어디에 나가서 온종일 놀고 늦게 들어와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하나도 쏟지 않는 것이 화가 났다. 엄마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고, 동생에게만 관심을 잔뜩 쏟는 것 같아 속상했다. 크면서 느끼는 좌절이나 고민을 엄마와 나누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성적이 올라서 기쁜 마음으로 가져가도 딱히 축하를 해주지도 않았고, 힘든 일이 있어서 울면서 들어가도 달래주지 않았다. 적어도 나의 기억은 그렇다.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억울한 면도 있을지 모르겠다. 기껏 키워놨더니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심함 덕분에 좋았던 점도 있다.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살짝 나쁜 일들도 호기심이 일어나면 해 보았다. 크게 말리지 않으니 장벽이나 두려움 없이 그냥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엄마는 아주 대담한 구석이 있으시다. 온전히 나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부모님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자식은 잘못된 길로 들지 않을 것이고, 위험한 짓을 하지 않을 거고, 사고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알아서 잘 살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혹 잘못을 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한 번은 고등학교 때 집에서 친구들을 데려다가 맥주를 사다 마신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 노래방 기계가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을 불러서 노래 부르면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허술하게도 맥주병을 베란다에 치워 두었다. 그런데 혼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후에 엄마가 은근히 알고 있었다는 신호를 주었다. ‘아, 엄마가 알고 있었는데, 아는 척을 안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그리곤 이내 두 가지의 마음이 들었다. ‘혼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왜 아는 척을 안 했을까.’

허술하게 술병을 베란다에 둔 것은 엄마가 알아보고 나를 좀 혼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라도 관심을 받고 싶었는데, 그러한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셨던 것 같다. 내가 반항하고 나쁜 짓을 해서 관심을 끌려는 속셈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효과가 어느 정도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집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엄마의 관심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받을 수 없는 엄마의 인정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나를 위해서 공부하고 활동하고 놀았다. 그리고 엄마의 의도였는지 아닌지 모르겠다만, 가끔씩 탈선(?)을 하곤 했는데 크게 빗나가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고 있다. 


엄마와의 이런 일화를 생각하면, 참으로 뭔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올라온다. 엄마는 어쩌면 밀당의 천재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통제를 하는 그런 방식 말이다. 나는 그런 엄마의 술수(?)에 항상 넘어가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그냥 혼낼 때 혼내고, 따뜻하게 안아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도 엄마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 빙빙 돌려가며 자신의 의중을 표현하고, 힘겨루기 하며 아이를 훈육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서툰 표현 방식은 아마도 고스란히 엄마 당신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그런 엄마 아래서 자란 나도 불쌍하지만, 엄마도 참으로 안 됐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게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내가 엄마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대신 나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내 아이를 혼낼 때 혼내고, 따뜻하게 안아주는가.’


다른 가능성도 있다. 엄마는 나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척박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잘 해내고, 성적도 좋고, 자기 길도 잘 찾아나가는 나를 보면서 무얼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딸이 해달라는 것이 있으면 해 주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이 딸을 위해서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도 크게 나쁘지 않은 방식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커서는 대학도 가고 대학원까지 간 딸은 엄마가 아는 세상에서 훨씬 넓고 먼 곳으로 벗어났다. 그냥 딸이 가는 길을 밀어줄 순 없어도 막지는 않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하려고 하신지도 모른다. 그것이 엄마의 방식이고, 다른 길은 알지 못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추측이다. 직접 물어봐서 풀었어야 했던 의문인데, 이제는 말을 꺼낼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바라는 모습과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엄마가 되니까 그것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예전에 지극히도 싫어했던 엄마의 말과 행동을 내가 따라고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신체의 한계, 살아왔던 삶의 방식에  맞춰서 아이가 바라는 것을 다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말이다. 상황에 맞춰서 판단하느라 그때그때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일관적이지 못하다. 어떨 때는 괜찮은데,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괜스레 더 아이를 잡는다. 아이를 보살펴줘야 하는데도 몸이 천근만근 같아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때도 있다.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는, 첫째에게 소홀해진 것이 사실이다. 어렸을 때, 항상 동생만 바라보는 엄마를 보면서 동생에게는 시기와 질투를, 엄마에게는 아쉬움과 서러움을 보낸 적이 많았다. 이제는 내가 동생만 사랑하고 더 돌봐주는 엄마가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첫째 아이가 미운 것이 아니라, 이런 아기가 손이 더 가고 때에 맞춰서 바로 반응을 해주어야 해서 그런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다 큰 녀석이 할 줄 아는 것도 많은데, 더 스스로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대한 것도 있다. 하지만 첫 째는 그저 자기에게 소홀한 것이 서러워서 만날 ‘엄마는 동생만 좋아하지? 날 사랑하지도 않고!’라고 말한다. 두 놈이 동시에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나에게 달려들면, 내 몸을 쪼갤 수도 없어서 참으로 난감하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면 여지없이 악을 쓰고야 만다. 얼마 전에 거울을 보니까 이마 사이에 주름이 두 개나 가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얼굴이 살포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삶을 살지도 않는다. 나의 삶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러 삶들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 이전에 할머니, 할머니 이전에 증조할머니, 증조할머니 이전에 고조할머니…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여러 선조들의 몸과 경험과 환경을 이어받은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총체를 다시 아랫 세대로 넘겨주고 있는 계승자, 연결자, 매개체이다. 나는 그분들과 본능적으로 아주 많이 닮았다. 유전이나 천성은 정말로 바뀌기 어려운 부분이다.  

더불어 1980년대를 관통하여 무려 2020년을 바라보는 때까지 살았고, 그 어느 때 보다 부유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밀레니얼 엄마이다. 갖은 교육의 혜택을 받았지만, 아직 사회에서는 받아줄 여력이 되지 않아 육아에 열중하며 자기 계발에 힘 쏟는 꿈 많고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것이 많은 엄마이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은 어느 세대에서도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옛날에 여자가 뜻을 세우고 이루는 것이 가당키나 했나. 엄마만 해도 산업화 역군인 여공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 공장에서 실밥 먹으면서 미싱을 돌렸다. 시집와서 아이 낳고는 켜켜이 쌓인 빨래를 커다란 ‘다라이’에 한껏 넣어 손빨래하고, 곤로에 불붙여 쪼그려 앉아 밥과 달걀부침을 했다. 할머니는 일제 점령과 해방기의 권력 공백기의 혼란, 6.25 전쟁, 이후 지독히 가난했던 보릿고개를 몸소 겪었다. 증조할머니는 말할 것도 없다. 조선 시대로 넘어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이전 세대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고, 그들이 꿈꾸었던 삶의 결과물이다. 언젠가는 그들이 살고 싶어 했던 삶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치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엄마의 삶.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오로지 나의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 꾸었던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지금 꾸는 꿈, 이상향, 살아가고 싶은 최고의 모습은 내 후대의 딸들이 엄마가 되어 살아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덜 해진다. 그리고 이후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쌓아주어야 할까, 무엇을 흘려보내 주어야 하는 것일까를 헤아려 보게 된다. 


지금의 나는 지난날에 엄마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부족했던 모습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엄마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성향도 있겠지만, 그것이 온전히 그분의 책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보다 훨씬 뛰어나게 잘 살아낼 수 있는가, 엄마보다 더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내가 더 낫다면, 그것은 더 많이 배울 기회가 있었고, 먹을 것이 풍족하고, 살림하는 환경이 좋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완벽한 부모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엄마와 나는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엄마한테 연락이 오면 무슨 일이 생겼나 가슴이 벌렁하다가, 아쉬울 것이 있으면 엄마를 찾아간다. 엄마는 내가 드리는 용돈을 받고 쓰윽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내가 첫째 임신했다고 전화했을 땐, 너무 기뻐하면서 생전 하지도 않았던 ‘사랑한다’라는 말도 하셨다. 둘째를 보시곤 잘 생겼다고 하시고. 그리고 또 감감무소식. 갑자기 핸드폰에 ‘엄마’라고 뜨면, 또 나는 ‘무슨 일 있나?’ 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별일 없이 그냥 안부 전화일 때도 있고, 정말 별 일이 있을 때도 있고… 그러면 부리나케 출동! 


추신, 

가끔씩 궁금해진다. 내가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 오로지 나의 꿈, 나의 욕망인지. 언젠가 엄마가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꿈을 내가 대신 이어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엄마는 언제나 겉으로 표현해서 나를 압박하기보다는, 은근한 방식으로 나를 이끌었으니까… 내가 대신해서 엄마의 꿈을 이루어주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도 뭐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썩 나쁜 꿈이 아니니까… 

이건 확실하다. 엄마가 아빠의 짧은 바지를 다리면서, ‘너는 키 큰 남자랑 결혼해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건 확실히 엄마의 바람을 내가 이루어주고 있다.

내가 엄마를 제대로 보내드린 것이 많나? 하는 의문이 인다. 그냥 엄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자.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일부러 부정할 필요는 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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