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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Jun 24. 2020

뭣이 중헌디

필사할 글을 화면에 띄워놓고 생각이 깊어졌다.


요즘 필사방에 올라오는 문장이 예전 같지 않다. 매일 오전 한 차례씩 올라오는 발췌 문장은 원본 책에 정말 이런 글이 있는가 싶게 어색할 때도 있고, 차적으로 누군가 편집글을 옮겨온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런저런 궁금증을 가지던 중, 그날따라 필요 이상으로 의심이 들어 구글에서 몇 개의 문장을 검색해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책에서 그대로 발췌한 이 아니었다. 융통성 없는 나1의 꼬장꼬장한 성격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지적하는 게 맞겠지?" 곧이어 나2가 나타나서 앞서가는 나1을 붙잡는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도 결정적이지도 않아."


나는 문제를 발견했을 때 곧바로 지적하는 사람,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수시로 건의하는 사람이었다. 할 말은 참 많다. '발췌 문장의 정확성 검수가 필요합니다, 문장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본 아닌 요약 글은 명시해 주세요.' 내가 아는 중립적이고 정의로운 온갖 형용사와 부사를 사용하여 이 상황을 알리고 정정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한참 이 무뎌진 요즘의 나는 반응하는 정도가 예전과 다르다. 이 상황이 객관적으로 불편한 게 맞다면 내가 아니어도 멤버 중 누군가 건의를 했을 것이고, 만약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정도의 불편함은 참을만한 수준인 것이다. 상황을 그냥 흘려 보내기로 한다.



"뭣이 중헌디"


영화 '곡성'에서 나왔던 대사이다. 내게는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든 사안에 똑같은 에너지로 따지고 드는 성향이 있어 스스로도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쓸데없는 꼼꼼함, 크게 도움되지 않는 완벽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성격을 못마땅해하던 중 '뭣이 중헌디'나를 구원했다. 가치 없는 일을 놓고 고민을 할 때 되뇌면 상황이 단칼에 정리가 되는 효과가 있었다.


글을 따라 적는 필사는 궁극적으로 글의 내용을 통찰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실행할 때 필사는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문장 몇 개가 정확하지 않은들, 맞춤법이 틀린들, 통찰하고 실행하는 데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아침부터 하찮은 상황을 놓고 30분이나 골몰했던 내가 오늘 참 한가하구나 깨닫는다.


그러던 차에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고소함을 넘어 뭔가를 태우는 듯한 냄새 같기도 하다. 밖에서 누가 장작불을 피웠나 피식 웃다가 여기는 시골이 아니라는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들면서 방에서 뛰쳐나갔다. 맙소사, 연기가 주방에 자욱하다. 글을 쓰기 전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았었다. 짧게 데우려는 생각에 최대 화력으로 올려놓았던 고깃국이 재가 되었다.


냄비 바닥이 타다 못해 녹아내리는 냄새로 머리가 아프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지만 지독한 탄내는 빠지지 않는다. 냄비를 식초에 담가놓고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놓고 얼떨떨한 정신을 추스르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화재가 나 않아서, 더 심각한 상황으로 연결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여기에 비하면 그깟 문장 몇 줄 정확하지 않은 것은 일도 아니지. 사소한 고민은 늘 더 큰 고민으로 해결되곤 한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미세먼지를 코로 마시며, 다 식어버린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자리 비우지 말 것"이라고 적은 포스트잇을 레인지 후드에 붙인다. 핑계 김에 쇼핑몰에서 주방용 타이머를 찾아 장바구니에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신이 번쩍 드는 아주 강렬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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