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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Jul 01. 2020

자식 걱정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녹색어머니 당번 날, 깃발을 들고 정해진 위치에 선다. 이제부터 30분 동안 할 일은 초록불이 켜질 때마다 깃발을 펼치고 아이들이 시간 내에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학교와 아파트 사이의 편도 2차선 도로는 대략 1분에 한 번씩 초록불이 켜진다.


요즘은 학년 별로 등교일이 나누어져 있다 보니 건널목을 건너 학교로 들어가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작년 같았으면 한 번에 수십 명씩 건넜을 횡단보도가 휑하다. 길을 건너는 아이들이 적으니 한 명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고양이 머리띠를 한 아이, 쌀쌀한 날씨에 옷을 얇게 입은 아이, 엄마 손을 잡고 등교하는 아이, 친구들과 장난치며 걸어가는 아이...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가까이 지나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어른들도 학생들 틈에 섞여 길을 건넌다. 등산복을 입고 산으로 향하는 할아버지들은 쩌렁쩌렁한 휴대용 라디오 소리를 퍼뜨리며 걷는다. 출근하는 성인들은 표정이 굳어 있고 걸음이 빠르다. 초등학생들에 비하면 훨씬 덩치가 큰 중학생들도 한 무리가 지나가고 저학년 아이들의 등교를 도와주는 엄마와 아빠들도 간간이 있다.


빨간 불이 켜진 동안은 지나가는 차량을 본다. 학교 앞이라서 조심하는 자동차도 있지만 노란불이 꺼지기 전에 어떻게든 건너려고 무리하게 직진하는 차들도 있다. 아침부터 바쁜 마을버스며 유치원 버스도 예외가 아니다. 보행 신호가 켜졌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를 지나가는 대형 차량을 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횡단보도에서는 집에서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대부분의 상황이 벌어진다. 아이들은 뛰고, 장난치고, 뛰면서 장난치다가 넘어지고, 실수로 떨어뜨린 물건을 주우러 차도로 내려가기도 한다. 집에서 숱하게 잔소리를 들었겠지만 친구들을 만나 흥분한 어린이들은 그 얘기가 무엇이던 금세 잊어버리는 것 같다. 불안 불안한 아이들의 아침 등굣길을 지켜보며 한숨을 쉰다.


그런데 넘어지고 떨어뜨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은 의외로 호들갑 떨거나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옆에 가던 친구들이 도와주고 같이 건너던 어른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조심성이 없고 주의가 산만한 내 아이의 등굣길이 늘 걱정이었는데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손길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놓인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순간순간 생각지도 못한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어떤 날은 우산을 못 챙겨줘서 마음이 쓰였는데 친구 엄마가 빌려주었다며 아이가 당당하게 우산을 쓰고 집에 왔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쳤을 땐 옆에 있던 엄마들이 처치해준 덕분에 꼼꼼하게 반창고를 붙이고 왔다. 학교 주변에는 그물처럼 촘촘하게 구축된 엄마들의 레이더가 있고 문제 상황이 포착되면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손길을 내미는 든든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이가 시시콜콜 얘기해주지 않는 한 이런 일들은 누구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일일이 알지 못하고 갚을 수도 없다. 누군지 모르지만 참 고맙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만났을 때 나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나의 아이도 그 덕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시청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아들 삼 형제가 머리가 희끗한 나이인데도 늘 곁에서 노심초사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내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저 어머니처럼 수십 년 동안 마음 쓰고 속 썩으며 늙어간다 생각하면 끔찍하다. 지금이라도 빨리 자식 걱정의 고리를 끊어내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자기 앞에 벌어진 일을 아이들은 살면서 요령껏 해결하거나 주변의 도움을 받겠지. 스스로 위험과 어려움을 깨닫고 다른 이의 도움이 고맙다는 것을 느끼며 '알아서' 크는 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면에서 나는 좀 이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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