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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Dec 06. 2020

엄빠의 마지막 자식

작은 녀석의 휴대폰 연락처 목록에 '우리형'이라는 이름이 저장되어 있다.


누군지 알듯 말듯한 이름의 정체가 궁금하여 통화 버튼을 눌러봤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누나의 전화기에서 부르르 진동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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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고 시끄러울 때, 저 녀석들 금방 싸우겠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 형 같은 괄괄한 누나가 가끔 놀아주면 작은 녀석은 이게 웬일인가 싶어 좋아라 까불거린다. 어울릴 상대가 있어 주체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진 이 녀석은 또래 친구들에게 하듯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어느 지점에서 누나의 심기를 건드린다.


좀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냉랭해지고, 배려 없고 눈치 없는 동생을 응징하는 누나의 속사포 공격이 시작된다. 체력으로나 말로나 누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 작은 녀석은 한 마디도 받아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 방으로 퇴장한다. 확신하건대 저 녀석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것이다.


어릴 적 오빠와 내가 농담을 주고받으며 놀다가 목소리가 커지면 엄마는 "저러다 울지"하고 혀를 찼다. 나이 차이가 많은 오빠가 어쩌다 나의 말 상대를 해주니 기뻐서 과하게 흥분한 나는 오빠의 머리 꼭대기로 올라가 촐랑댔고 그러다가 선을 넘으면 꿀밤을 맞고 훌쩍이며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진지하고 원칙적인 오빠에게 깐족거리다 싸움을 만드는 나는 천방지축 날뛰는 동생이었다. 내 딴에는 상대의 기분을 살핀다고 하지만 눈치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며칠 잘 지내다가 한순간 뭔가 거슬리는 행동을 할 때면 오빠에게 불같은 호통을 들었고, 오빠가 기분이 안 좋은 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농담을 걸었다가 신경질과 짜증을 되받았다. 어떤 대목에서 화가 난 건지, 무슨 행동이 잘못된 건지, 그냥 원래부터 화가 나 있던 것인지 궁금할 만 한데 그 당시에는 이해력이 부족했고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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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둘이 잘 놀다가 싸우고 토라지고 의견이 안 맞아 시끄러운 상황을 종종 관전하는 요즘, 나와 오빠의 모습이 부쩍 자주 떠오른다. 솔직히 나와 비슷한 입장인 둘째 녀석에게 더 감정이 이입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잠들기 전 두 녀석이 주고받은 말을 되새기다 보면, 맏이가 가지는 복잡한 감정이 미세하게 전달되는 듯하다.


첫째를 낳고 처음 맡는 부모 역할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육아 전문가들이 인터넷에서 말하는 대로, 책에서 읽은 그대로 아이를 키웠다. 하지 말라는 행동은 철저하게 하지 않았고 좋다는 것은 웬만하면 따랐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큰 아이는 활달한 성격이지만 매사에 원칙적이고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안정적이나, 원칙을 따르지 않거나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과의 관계는 편하게 느끼지 않는 듯하다. 바로 옆에서 원칙과 질서를 해치는 동생의 얼굴을 매일 봐야 하는 상황은 큰 애에게 어지간히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작은 아이는 부모의 원칙이 자신에게는 느슨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 정도로는 꾸중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여유로움이 행동에서 드러난다. 첫째보다 가족의 기대가 낮아서 작은 성취에 때로는 칭찬을 받는다. 부모에게 적당히 애교를 떨 줄 알고 넌지시 누나의 잘못을 일러바친다.


숨만 쉬고 있어도 누나에겐 스트레스인 작은 녀석은 때때로 은근슬쩍 누나를 공격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엄마 아빠가 없을 때 누나의 말을 살살 무시하며 약을 올리거나, 친구들 앞에서 장난 삼아 누나의 약점을 폭로하는 등, 누나에게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몇 달을 참던 큰 아이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어느 날 그동안 쌓은 감정을 한 번에 폭발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큰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한동안 생각했다. 이번에는 이해가 될 때까지 곱씹었다. 부모가 동생에게 똑같이 엄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억울한 감정, 같이 잘못해도 자신에게 배려를 요구하는 것에 대한 부당한 감정,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 편에 기울 때의 서운한 감정... 내가 맏이였다면 큰 아이의 심정을 더 일찍 알아차렸을까. 동생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품고 지내왔을 감정의 응어리를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마음이 쓰렸다.


어쩌다 컴퓨터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사진 폴더를 열었다. 유치원생 시절의, 초등학생 시절의 첫째는 표정이며 동작이며 그냥 어린 아기 같다. 이때에도 나는 이 아이에게 양보하라고 이해하라고 말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아이에게 어른스러움을 요구하는 말을.


우리가 모두 어렸던 그때, 부모님에게 서운함을 느낀 만큼 오빠가 나에게 불친절했을 거라고 지금은 짐작할 수 있다. 어린이 중에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어린이에게 이해나 양보를 더 요구하는 행동은 아무래도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문득, 큰 아이는 휴대폰에 동생의 이름을 뭐라고 저장해 놓았을지 궁금해졌다. 휴대폰의 연락처를 찾으니 최근 통화한 가족과 친구들의 목록이 있다. 조금 더 넘기다 동생의 이름이 등장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동생의 이름은 바로 '엄빠의 마지막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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