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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Dec 12. 2020

음식 트라우마

못 먹거나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지 질문을 받으면 한참 생각한다. 못 먹어본 음식은 있어도 가리는 음식이 있었던가. 음식에 대해서는 무던한 편이어서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주 싫어하는 것도 없다. 식사를 겸한 미팅과 회식이 끔찍하게 많았던 회사 생활에서 도움이 되었던 것 한 가지가 바로 음식에 대한 무취향이었다.


그런 식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제껏 멀쩡하게 잘 먹어오다가 한 번의 사건으로 트라우마가 생길 뻔했던 위기의 음식이 있다.


상추

한동안 집 근처에 텃밭을 분양받아 쌈채소를 길렀다. 몇 평 안 되는 땅에서 상추가 쑥쑥 잘 자라 이웃에도 나눠주고 우리 가족도 열심히 쌈을 먹었다. 약을 치지 않으니 가볍게 물에 헹궈서 상에 올렸는데, 어느 날인가 쌈을 접다가 우연히 상추 뒷면에 다닥다닥 붙은 알 무더기를 목격했다. 명란젓이 묻었나 싶어 들여다봤으나 젓갈보다 영롱하고 반질반질한 그것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곱게 낳아 놓은 곤충의 알이었다.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호들갑을 떨면 잘 먹던 사람들까지 평생 상추와 담을 쌓을까 싶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야 했다. 다른 것보다 구충제를 유난스럽게 사다 먹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가족들은 알지 못한다.


참깨

여름에 집 안에 초파리가 많이 날아다녔다. 작아서 잘 잡히지도 않는 초파리는 눈앞에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여느 때처럼 쓰레기통 주변을 치우던 중 바닥에 참깨가 쏟아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깨를 여기 쏟았을까 궁금해하면서 눌러 모으다가 휴지에 잡힌 알갱이가 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이것의 정체는 내가 생각했던 고소한 참깨가 아니라 초파리의 알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절초풍할 상황이었으나 바닥에 살충제를 흥건하게 뿌리고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현장을 수습했다. 수 백 마리의 초파리를 부화하기 전에 박멸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참깨를 맨 손으로 주워 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번데기

회식의 끝 무렵 사람들과 얼큰하게 취해서 뚝배기에 담긴 뜨끈한 번데기를 건져 먹는 중이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번데기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며 말을 꺼냈다. 경험상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얘기는 아름다운 이야기일 수가 없다.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이미 ‘번데기의 주름을 쭉 펴면 숨겨져 있던 다리가 나온다’는 짧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뒤였다. 계속 비밀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그 이야기를 듣고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잘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돼지껍데기

돼지 껍데기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친구들과 허름한 식당을 찾았다. 반듯한 사각형으로 잘려 나오는 돼지 껍데기는 사실 특별한 맛은 없지만 식감이 좋았다. 불판 위에 껍데기를 앞뒤로 뒤집어가며 굽다가 긴가민가한 무언가에 시선이 갔다. 돼지 뱃살 부분이었던 듯 껍데기 위에 찌찌가 고스란히 붙어 있는 것. 이 부위도 먹는 거냐, 잘못 들어간 거 아니냐, 떼고 먹는 것이냐… 껍데기 초짜들이 고민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돼지 껍데기의 유통은 단골에게만 내어주는 부위’라는, 믿거나 말거나인 누군가의 블로그 글을 찾아 읽고 기분이 좋아진 단순한 우리는 결국 남김없이 먹고 나왔지만, 그 이후로 나는 껍데기를 구울 때마다 앞뒷면에 뭐가 없나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예 못 먹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젠가 본 그 장면을 떠올리므로 나에게 이 음식들은 '마지못해 먹는 음식'이 되었다. 이들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는 듣는 쪽에서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리고 괴로워하는 하드코어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잘 먹던 음식에 트라우마가 생기는 일도 있지만, 원래부터 특정 음식을 못 먹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누구는 원래부터 회를 못 먹고, 누구는 돼지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아서 회식을 할 때마다 팀의 막내가 장소를 놓고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육식을 안 하는 사람,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흔하다. 밥에 들어 있는 콩을 골라내는 사람도 있고, 생각지도 않게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있으면 가리지 않고 먹는 내 입장에서는 어떤 거부감인지 잘 이해되지 않지만 냄새, 식감, 맛 뭐든 안 맞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원래 싫어하는 음식이건, 안 좋은 경험을 하고 나서 싫어진 음식이건, 성인이라면 못 먹는 것을 억지로 먹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어른이어서 좋은 점은 먹기 싫은 음식을 안 먹어도 되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 아닌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나 이거 안 먹어'라고 말하면 편식이 아니라 취향으로 인정해줄 때,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런 사실을 말하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모두 쿨하고 멋있다.



귀여운 밤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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