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osumer Nov 29. 2023


빨래방 근무일지 231129

어제 자정, 빨래방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배달시켜 드신 그대에게...

그대여, 안녕하세요?

'그대' 뜬금없다구요?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용기를 내어 펜을 들어봅니다. 사실 만난 적은 없지만 저는 이미 그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오늘 아침 사무실 출근 전에 빨래방 청소를 하러 빨래방에 들렸습니다. 청소를 할때 일의 순서는 늘 비슷합니다. 빨래방을 먼저 쓰윽 둘러보고, 큰일(?)이 없었는지 확인을 합니다. 늘 빨래 바구니나 세탁망 등은 제자리에 있는 적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고객들이 자기 물건도 아닌 물건을 가져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고이 제자리에 놓아주기를 절대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런 물건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은 큰일이 아닙니다. '일상다반사'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맴버십 카드 키오스크 재부팅까지 마치면 약간 두근두근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와서 매장에 있는 일반 쓰레기통과 재활용 쓰레기통을 비워야 하는 순서입니다. 보통은 재활용 쓰레기통을 먼저 열어봅니다. 매장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음료 빈 깡통을 발견하면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이 빈 깡통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면 완전 대박이구요. 아, 그렇다고 매장 자판기에 판매하는 음료의 빈 깡통이 아니라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빨래방 바로 앞에 GS25가 있거든요. 저도 가끔 GS25에서 뭐가 하나 사들고 매장에 가기도 합니다. 목마른 고객님이 버린 음료 빈 깡통은 10개도 치워드릴 수 있습니다. 쓰레기 봉투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옮기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일반 쓰레기통인데,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가장 좋고, 무엇이든 조금만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반 쓰레기는 종량제 쓰레기 봉투를 구매해서 버려야 하니까요. 째째해보이지만 모든 자영업은 비용 혹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 중요해요. 갑자기 빨래방이 미친 듯이 잘 되는 경우는 없거든요. '나 혼자 산다'의 '기안84'가 제 빨래방에 와도 사실 매출이 오른다는 보장은 없어요. 아,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갔네요. 다시 일반 쓰레기통으로 돌아와서 말씀드리면 일반 쓰레기통을 열기 전에 음식물 쓰레기는 아니고 배달 음식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진심으로요.


놀라지 마세요. 여러가지 흔적('쓰레기'라는 말보다 '흔적'이 예쁜 것 같아요)들을 이미 본적이 있습니다. 그나마 제가 덜 놀란 것은 제가 배민커넥트로 자전거 배달을 1,000건 완료했던 사람이라서 대충 배달 음식 용기만 봐도 어떤 음식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혼자서 먹기는 어려운 족발 세트 흔적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한창 더웠을 때 숯불고기와 냉면 세트 정도는 저도 먹고 싶더라구요. 다먹은 컵라면 용기도 있고 여튼 다양한 흔적에 대한 소개는 이만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남긴 흔적이 이제 제 빨래방 청소 중 발견한 인상깊은 흔적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에요.


'그대'라고 해서 놀라셨죠?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아, 힘들게 조사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전업으로 빨래방을 하는 것은 아니라서 매장 CCTV도 아직 확인을 못했어요. 우선 그대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준 것은 쿠팡 이츠 배달 영수증이었어요.

배달 시에 수저와 포크를 넣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아 그대는 환경보호에 앞장서는 사람인 것 같아요. 양념 치킨보다는 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는 거 맞죠? 건강을 생각해서 콜라도 안마시는데, 자정을 30분 남긴 시간에 후라이드 치킨을 먹은 것을 보니 혹시 '치팅데이'였나요? 후라이드 치킨은 양념 소스와 치킨무랑만 같이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는 머스타드 소스를 제 와이프는 소금을 찍어먹는 것을 좀 좋아하는데 뜯지도 않은 소스랑 소금은 양념이 좀 묻어서 가져가지 못했네요. 그리고 흔히 '퍽퍽살'이라고 부르는 닭 가슴살 부위는 남긴 것을 보니까, 약간 지방이 있는 부위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때요? 이 정도면 '그대'라고 부를 만 하죠?


바쁘기도 하고 뭔가 신비감 있게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매장 CCTV는 돌려보지 않을께요. 사실 지난 주에 3번 세탁기 세제 공급이 안되는 고장이 있어서 빨래방을 살펴보러 자주 들렸었는데, 지난 주였다면 저희가 빨래방에서 만날 수도 있었겠어요. 매장에서 치킨 한번 먹은 것을 가지고 '영업방해'로 신고나 고소를 할 생각도 없어요. 뉴스 보셨어요? 요즘 경찰들이 예산 부족으로 '초과근무수당'도 못 받고 있다네요. 이런 분들에게 업무를 더 준다는 건 미안한 일이죠. 쿠팡을 통해서 고객 정보를 확인하는 방법도 있지 않냐구요? 아, 제가 경찰도 아니고 제가 자전거 배달할 때도 라이더도 고객 전화번호도 알 수가 없어요. 전화를 할때는 다른 번호로 연결이 된 다음에 연결이 되거든요. 쿠팡 이츠에 물어볼 수 있지 않냐구요? 쿠팡 이츠 고객센터는 배달 시킨 고객이 왕이지, 저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되요. 다만 빨래방 의자가 바 스툴 형태라서 높이도 좀 있고 편안하지도 않은데, 여기서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를 다 해치운 그대를 생각하니 이것도 목이 매이네요. 아, 그래서 그대가 퍽퍽살은 먹지 않은 건가요?

일반 쓰레기통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 후라이드 치킨 흔적을 쓰레기통에 넣는라고 수고하셨어요. 쓰레기통을 더 큰 것으로 바꾸면 좋겠지만, 매장이 크지도 않고 큰 쓰레기통이 놓여있다면 더 쓰레기가 많이 생길 것 같아서 그냥 지금 것으로 쓸께요.

음... 그대가 외국인일 수도 있으니까 'NO FOOD' 외에 좀 더 자세한 안내를 영어 정도로 추가하면 될까요? 빨래방 청소하다가 카자흐스탄이랑 베트남에 온 손님들은 만난 적이 있어요. 진공청소기로 건조기 먼지망 청소를 하느라고 "Excuse me"하고 했더니 "아, 비켜드릴께요" 하셨어요. 다른 분도 영어로 말을 걸었더니 한국말을 잘해서 빨래방 안에 영어 안내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앞으로 정기적으로 후라이드 치킨 흔적이 보이면 그때는 꼭 그대를 찾아서 연락드릴께요. 저, 예전 회사에서 무자료 거래 현장을 포착하느라고 잠복근무를 했던 적도 있어요. 좀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요. 마지막으로 근방에서 최저가로 후라이드 치킨을 시키려면 강동역 근처에 '후라이드 참 잘하는 집'이 있어요. 동네 가게 같지만 '하하'가 광고 모델인 프랜차이즈인데요, 포장하면 한 마리에 11,000원이에요. 이 가격에 후라이드 치킨을 드시면 빨래방에서 세탁기를 돌릴 돈이 남아요! 어때요? 


종량제 봉투가 투명하다 보니 봉투에 넣은 그대의 흔적이 빨래방 관리실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계속 눈에 밟히네요. 그래도 우리, 어쩌다라도 마주치지 않기로 해요. 후라이드 치킨보다는 오뎅 한 꼬치가 어울리는 날씨, 점심을 안먹고 몇 자 적어봅니다. 


이만 줄일께요! 안녕 :)


P.S. 혹시 부산 분이세요? 부산 엑스포 투표결과를 기다리면서 후라이드 치킨을 먹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요...




작가의 이전글 빨래방 근무일지 23112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