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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Apr 10. 2024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주의'가 꼬리에 붙은 단어는 늘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신자유주의가 특히 그랬다. 자유주의는 뭐고, ‘신'은 왜 붙는지. 단어의 생김새 자체가 불분명한 정보를 전달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늦게 개념을 이해한 편인데, 이 단어만큼 현대 사회를 정확히 설명하는 개념도 없다고 느꼈다.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은 대학에 성공적으로 입학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찾아가며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게 성장과 경쟁이라는 사회적 지향을 개인이 내면화했기 때문이라니. 사회 구성원으로서 훌륭히 기능하기 위해 스스로를 꾸짖는 거라니, 세상이 음흉하게 조직된 것 같은 음모론 같으면서도 틀린 말 하나 없었다. 그렇게 다들 바쁘게 산다.


물론 그 바쁨 속에 개인의 욕구와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주체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내 친구들을 엇비슷한 방식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신자유주의는 평준화를 이뤄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너무도 우수하게 사회적 요구를 완수해냈고, 지금도 그러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으로 정해진 길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이것이 우리에게 당연한 삶이었다. 문제는 이 당연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 실패와 미흡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의 계발을 해내지 못할 때, 화살은 개개인에게 향한다. 게으름, 나태함, 능력 부족, 의지 박약… 결국 자기 한심. 하지만 여기서 물어야 한다. 왜 누군가는 성공적으로 정해진 길을 잘 따라갈 수 있었고, 누군가는 불가능했는지. 정말로 개인이 노력한 정도가 달랐기에 나타나는 결과인가?


요즘은 신자유주의가 극화된 것인지, 모두가 자기 관리와 계발 담론에 더 깊이 매몰되어 가는 것 같다. 그만큼 노력하지 않는 삶을 단죄하는 것도 더 단호해졌다. 우리 사회는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얼마나 폄훼하고 매도하는가. 정상성에 대한 견고한 환상이 결국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존중을 박탈당하며, 존재조차 삭제된다. 각자 어떤 삶의 무게를 지고 있는지, 인생의 굴곡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걸 알지 못한 채 타인의 삶을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


이게 빈곤을 자세히 알아야 하는 이유다. 빈곤은 우리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할 법한 기질과 성향에도 깊숙이 관여한다. 우리가 체화하고 터득한 경쟁과 성장의 법칙은 사회의 많은 기반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심지어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법과 규칙도 마찬가지였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취하며 살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충분한 돌봄과 지원이 있어야 사회의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다. 이 또한 <가족을 폐지하라>를 읽을 때 얘기했던 돌봄 문제로 이어진다. 개인에게 돌봄의 책임과 의무를 전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 보호자가 충분한 돌봄을 제공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공동체에 편입되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한번 궤도에서 미끄러졌을 때,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빈곤이 삶에 다면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빈곤이 가진 삶의 무게와, 빈곤이 만들어내는 인생의 굴곡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아주 가까운 시선으로 풀어냈다. 일시적인 시점이 아니라 10년의 시간을 보았다. 아이들의 연속된 삶을 지켜보며 변화하는 빈곤을 기록한 것이다. 빈곤의 인과를 개인에 두지 않고 그 시야를 횡적으로(10년의 시간), 그리고 종적으로(부모와 조부모 세대) 확장했다. 빈곤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심화하기도 하며, 극복되기도 한다. 또는 시간이 지나면서 빈곤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서 새로운 상황을 직면하기도 한다. 빈곤의 얼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면뿐만 아니라 이면까지도,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들여다 봐야 했다. 오랫동안 아이들의 삶을 기록해보겠다는 저자의 다짐은 빈곤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수많은 의문을 품어가며 긴 세월 기록을 이어갔을 작가의 작업에 감사함을 느낀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감정은 연민이 아니었다. 이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시선에서부터 연민이란 없다.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등한 존재이자, 현재의 어려움을 나름의 방식으로 대처하고 전진하는 현명한 존재로 바라본다. 존경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스스로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타개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서술한다. 빈곤을 겪는 아이들을 불쌍한 아이들로 만들지 않았다. 빈곤을 말하는데 포르노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빈곤을 딛고 일어서는 방법을 찾음과 동시에 빈곤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를 끊임없이 마주치고, 또 해결하기 위해 분투했다. 대한민국의 누구나 그렇듯, 치열하게 살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 또는 친구들의 삶과 대조해가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었다. 동시에 전혀 몰랐던 세상을 알았다. 사회의 어엿한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특권이었구나. 새로운 깨달음에 쉼 없이 감탄하고 반성했던 책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구조적인 시각이 필요했다. 아니,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절실했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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