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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Feb 02. 2024

아니 에르노, 『빈 옷장』

나열식 서술이 다소 난해하다. 갑작스런 은유가 떠오르고, 건너뛰고, 생략한다. 마치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내용의 구분도 없었다. 그래서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호흡을 멈출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화자 르쉬르는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갔고, 변해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삶의 기록이었다. 모든 것이 점진적으로 바뀌고 도저히 구획을 나눌 수 없는 연속된 삶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다.


독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첫 장면이 너무도 강렬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스물의 여자아이가 겪는 낙태라니. 그에 대한 자초지종도 설명하지 않고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까닭에, 르쉬르가 어째서 그런 장면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르쉬르의 어린 시절은 풍요롭고 행복했다. 식료품점과 카페를 겸하는 부모님의 가게에서 르쉬르는 늘 주인공이었다. 물건이 많은 환경에 살았고, 무엇이든 손을 뻗어 가질 수 있었다. 카페의 손님들은 모두 르쉬르를 알았다. 이들은 공사장 인부이거나, 요양원에 사는 노인이거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외상이 기본이었다. 르쉬르는 이들을 좋아했다.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 경박한 태도, 비속어가 가득한 투박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었다. “그곳은 냄새로, 연기로,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던 이들로, 나를 무릎에 앉히고 술에 취하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좋아했던 이들로 뜨거웠다.”


어머니와 아버지, 르쉬르 식료품점 및 카페를 구석구석 사랑하고 경외한 아이는 사립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계급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을 자랑하는 천진난만함은 경멸과 비하에 꺾여나갔다. 르쉬르는 침묵을 배웠다. 두 세계를 구분하고 비교해나갔다. 하지만 더러운 작업복을 보거나 구내 식당의 청어 냄새를 맡았을 때 “무언가 되찾은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걸 보아 자신이 뿌리내린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듯했다. “진짜 언어는 우리 집에서 내가 듣는 것이다. 싸구려 포도주, 질 나쁜 고기, (…) 늙은 암말, 꼬마야,…”


르쉬르에게 학교는 계급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기득권의 생활 방식에 대한 옹호, 그 외의 방식에 대한 배제. “학교에서 나는 모욕을 배웠고, 모욕을 느꼈다”, “선생님은 ‘저급함’은 숨기는 게 낫다고 하셨다.” 사립학교에서의 경험은 날 것의 일상이 정제된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사회라는 틀 안에 집어넣기 위해 자연스러운 개인을 다듬고 잃어간다. 르쉬르는 사회에 틀에 맞게 차츰차츰 조각되었다.


결국 르쉬르는 계급을 흡수했다. 어린 눈은 계급을 소화했고, 자본을 셈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찬란한 세상이라 여겼던 집과 동네는 더럽고 추잡한 공간이 되었다. 르쉬르는 부모를 원망하고 한심해했으며, 비굴함을 배웠다. 르쉬르는 부모와 가게와 동네에 대한 경멸을 아주 길게 설명한다. “열네 살, 세상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137)


르쉬르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를 이어가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뤄갔지만, 패배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운 세상과 그곳의 남성 앞에서 초라해진다. 재즈에 통달한 남자, 돈과 법에 능통한 남자… 출신에서 오는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초라하게 여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증오만을 먹였다”, “내 문화는 싸구려다.” (200) 결국 르쉬르는 ‘부르주아’ 남자아이를 만났고, 낙태를 겪었다. 그 남자애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해외로 나갔고, 연락이 닿지 않았다. 르쉬르가 임신과 낙태를 언급할 때면, 극심한 자조가 느껴진다.


사회는 상하로 나뉘어 있고, 르쉬르는 그 사이 경계에 서 있다. 르쉬르의 고통은 배웠기 때문인가? 아이를 사립 학교에 보낸 니니즈의 부모가 선택을 잘못한 것인가? 르쉬르의 낙태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다리가 찢어진 결과인가? 마지막에 아빠의 말이 나레이션처럼 얹힌다. “저 애가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행복했을 거야.” 에르노는 처참한 계급 사회를 보여주었다.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곳.


우린 비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교는 후천적 가치에 의해 발생한다. 르쉬르에겐 분명 부모와 가게와 손님을 사랑했던 정체성이 있었지 않은가. 계급의 학습은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르쉬르의 어린 눈을 지워버렸다. 읽고 나서 돌이켜보니 르쉬르가 삶을 사랑한 부분은 참 짧았다. 우리는 소중한 시각을 얼마나 빠르게 잃었을까. 이 이야기는 먼 곳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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