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이 되어 되감아보는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는 특별했다. 2013년 TV 앞에 자리를 잡고 본방송을 보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 나는 무려 수능이 끝난 고3이었고, 쓰레기파와 칠봉이파로 나뉘어 친구들과 싸우기 바빴다. 그땐 대학에서 철없이 노니는 등장인물의 삶이 미래였고, 오랫동안 고대하던 모습이었다. 그렇게 설렘과 재미만을 느끼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다시 보니, 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옛날의 감정들이 생각보다 바래고 흐릿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사의 재생은 지나온 시간을 더듬는 일이었다.
나는 삐삐를 모른다. 서태지도 잘 알지 못한다. 응사에 나오는 모든 대중문화는 낯설지만, 학교에 다니고자 상경해서 낯선 서울에 친구들과 함께 적응해가는 모습은 익숙했다. 시끌벅적한 우정과 서툰 연애는 내가 겪은 시간과 똑 닮았다. 그 시절 울고 웃고 뜨겁고 철없었다던 서술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낭만이 된 기억들. 이십대 후반에 서니 흘러간 시간을 셈해보다 생경해하는 때가 잦아졌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면 늘 스물셋넷에 멈춰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린 시간의 통과를 체감하지 못하고, 강렬한 그때에 쭉 머물러 있다.
이 드라마는 스물과 스물여덟 사이의 시간을 담았다. 스물여덟의 초입에 이 드라마를 찾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알고리즘이 모종의 데이터로 인하여 스물여덟들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해준 건 아닐까? 덕분에 나는 나의 스물부터 8년의 시간을 회고했다. 조금씩 서울에 익숙해지고 세상을 알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이 나의 변화를 대변했다. 주인공의 머리카락처럼 나도 다소 얌전해졌고, TPO의 규칙에 적응해갔고, 나름대로의 요령도 갖춰갔다. 이렇게 딱 8년만큼의 연륜을 얻었다. 동시에 활기와 천진난만함을 조금 잃었고, 철 없어도 되는 권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대한 자세한 기억을 잃었다. 기억은 영상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자꾸 울음이 나왔다. 응사에서는 현재의 젊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과거였기 때문이다. 젊음은 회고의 틀 안에 있었다. 현실과 다른 게 있다면, 기록된 젊음이라는 축복이자 환상 같은 특징이다. 나의 과거는 기록되지 않고 영영 사라졌다. 돌아갈 수 없고,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 시간들이었다. 이때의 잃어버림은 분실이 아닌 상실이다. 완전한 사라짐. 만들어진 세상이지만, 영상에 시간을 고스란히 보관한 인물들이 참을 수 없이 부러웠다.
찰나 같아 찬란했다는 노래 가사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시간은 눈 부시게 아깝다. 여전히 난 젊지만 찰나와도 같은 현재를 살고 있다. 스쳐지나가는 지금이 아쉽기에 최대한 움켜잡기 위해 노력해야지. 나중에 또 다시 응사를 찾게 될 것 같다. 그땐 더 바래고 옅어진 이십대의 기억을 더 소중하게 만져보겠지. 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