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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Apr 12. 2024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딸의 감정, 표정, 삶은 어머니와 동일시된다는 것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세계의 시간에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동시대를 살지만 다른 시대를 산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고방식이 각자의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고,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난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증오하게 될 수도 있다. 마음 깊이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비비언 고닉은 이 애증을 생생하게 풀어냈다.


비비언 고닉의 시선은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이다.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엔 관조적인 건조함이 있었다. 마치 타인의 삶을 기록하는 것 같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성장과 배움과 슬픔과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엄마와의 충돌을 차분하게 회고한다. 특히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가 슬픔을 전시했고 연출했으며 자기만 독점했다는 서술에서 그 단호함과 날카로움이 가장 생생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과거의 일을 똑바로 바라보고 내릴 수 있는 명쾌한 해석.


이 에세이는 엄마와 고닉 사이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시 여성들의 삶, 이민자 2-3세들의 삶, 도시의 삶이 교차한다. 한 권에 걸쳐 서술한 모녀의 애증 관계에는 세대와 계층과 젠더의 흔적이 놀랍도록 다층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다툼은 노동자 계층의 삶을 살았던 엄마와 고등 교육을 받은 딸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발생하기도 하고, 당시 여성으로서 많은 한계를 부딪혀야 했던 엄마의 삶에서부터 발생하기도 했다. 뉴욕의 무수한 가정 중 단 하나를 보여주었을 뿐인데 이리도 시대를 대변한다. 모든 개인의 삶이 그렇겠지.


모녀 사이라는 흔하고 구체적인 관계를 써내려간 탓에, 읽는 내내 나의 삶을 떠올렸다. 내 삶과 내 부모와 내 성장과정을. 그러나 저자와 달리 난 엄마와 충돌하지 않았다. 엄만 늘 나를 안아주었고, 이해해주었고, 경청해주었고, 나의 어리광이나 감정을 받아주었고, 칭찬해주었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니까. 오히려 난 계속해서 아빠를 떠올렸다. 내게 사나운 애착이란 아빠를 뜻했다. 아빠도 내 얼굴에, 내 성격에, 내 삶 곳곳에 자리하고, 동시에 늘 나와 충돌했다. 똑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르기에 사사건건 부딪혔다. 난 아빠를 무지하게 사랑하면서도 온갖 싫은 점을 꼽을 수 있었다. 아마 21세기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아빠와 사나운 애착 관계를 가질 확률이 높지 않을까. 지금은 여성의 위치, 사고방식, 사상이 변화하는 시대였고, 그 변화를 흡수하는 딸과 강한 보수성을 지닌 아빠는 충돌이 예견된 사이다. 아빠와의 복잡한 거리감을 토로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단절에 가까운 경우도 있었고, 마찰이나 폭발에 가까운 경우도 있었다. 사납다 못해 휘몰아치는 이 애착이야말로 기록할 만한 것이다. 1980년대 미국 이 모녀의 사나운 애착이 대변할 수 있었다면, 2020년대 한국에는 부녀 사이의 사나운 애착이 있다. 언젠가 필히 써봐야지.


부럽기도 했다. 그 애증의 상황을 자주 겪는다는 것이. 자꾸만 내게 없는 것이 보였다. 그 애증 관계도 결국 붙어 있으니까 가능한 다툼이겠지. 부모와 가까이에 살지 못하는 현실이 불만스러워졌다. 오늘밤 통화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차려보니 열한 시가 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현실. 점점 1년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드는 현실. 고닉의 생생하고 날카로운 기록은 나와 부모님 사이의 물리적 거리감을 체감하게 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책의 바깥으로 튕겨나오듯 갑작스런 현실의 감각을 마주했을 때, 무거운 아쉬움과 죄책감이 한데 뭉쳐진 감정을 느꼈다. 비비언 고닉의 문장에 대한 온갖 감탄은 책 속에 머무를 뿐이었다. 책의 바깥엔 내가 부모와 멀리 분리되어 있고, 드물게 연결되며, 그래서 더 가까운 애착의 시간을 원한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난 그저 부모와 같은 도시에 머무르며 자주 산책하고 콘서트를 보러 가는 삶이 부러웠다. 비비언 고닉은 그 삶을 누군가가 부러워할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 이미 가진 것을 보지 못할 텐데.


물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애증 더 맹렬히 타오를 것이다. 여행을 가도 나와 아빠는 꼭 분위기를 한번씩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비비언 고닉도 단호한 문장으로 책을 끝마친다.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

“안 그럴 거 알아, 엄마.”

이들은 확신한다. 이렇게 가까이에 살지 않을 리 없다고. 숱한 싸움과 피로를 끌어안으면서도 서로의 존재가 너무 거대하고 중요하다고. 지긋지긋하다는 건 소중함이라는 빛이 필연적으로 갖는 그늘이다. 소중함을 막연하게만 느낄 수 있는 행운. 애착은 사납든 흉포하든 결국 사랑하는 마음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애착을 수식하는 모든 형용사를 거쳐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과 밀착이다. 아빠에 대한 분노가 늘 미안함과 애정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어찌 되었든 나는 우리 아빠를 무지 사랑한다. 이게 이 책에서도 발견해야 했던 결말이다. 결국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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