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량 Jun 07. 2024

『작은 아씨들』

이미 읽은 책에는 손길이 잘 가지 않는다. 이야기는 늘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자주 잊고, 체크리스트에 줄 긋듯이 읽을 책 목록에서 지워버리곤 한다. 하지만 고전은 다시 읽어야 빛난다. 그래서 이번 독서모임의 책으로 <작은 아씨들>이 호명되었을 때,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새롭지 않아 아쉬우면서도 새롭지 않아 반가운 느낌. 그러나 역시 이야기는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우린 삶의 다양한 면면을 요목조목 비춰보고 깊은 대화를 나눴다.



홀로 서는 여성의 위치: 야망과 외로움 사이



조의 결혼은 뜨거운 화두였다. 조가 왜 로리와 결혼하지 않았는지, 그러다가 왜 다시 결혼하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왜 결국 프리드리히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우린 조의 거취에 일제히 주목했고 열띠게 토론했다. 소설은 네 자매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조에게 무게중심이 있고, 우리는 자연히 조의 감정에 이입했다. 물론 <작은 아씨들>은 조가 주인공인 게 분명했다. 자전적 성격을 띤 소설이었고, 작가는 조와 같은 둘째였으며, 조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것도,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작가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시대의 요구에 꺾이지 않고 빛을 내는 조를 어떻게 사랑히자 않을 수 있을까. 우린 모두 조의 편이자, 조 그 자체였고, 조를 선망했다.


내심 조의 사랑을 응원했다. 특히 <작은 아씨들(2019)> 영화로 인해 로리는 티모시 샬라메로 실체화되었고, 티모시의 화려한 매력 탓에 마치 연애 소설을 읽듯 조와 로리의 케미스트리를 응원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조가 로리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수없이 외치지만 로리는 널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되감아주는 장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강렬한 장면이었다. 로리만큼 조의 넘치는 생명력, 활기,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조의 강인함과 독립심을 동경했다. 우리가 쉽사리 선택하지 못한 독신의 길을 조가 꿋꿋하게 걸어가길 바랐다. 조가 로리와 결혼하지 않은 건 로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로리를 거절한 것을 후회하고 로리의 마음에 화답하려 하지만, 그때 조가 엄마에게 외친 말은 “너무 외로워요"였다. 로리에 대한 갈망이 아닌, 외로움에 대한 구제를 원했다. 조는 홀로 살길 선택한 여성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외로움을 토로했다. 강인한 여성은 외로움을 끌어안기에 강인할 것이다.


결국 조는 결혼하지만, 작가는 독신으로 삶을 마무리했다. 소설 속 조는 출판 시장의 요구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면, 현실 세계의 조는 홀로 오롯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조가 고백한 외로움은 작가의 진심이었겠지. 독립적인 여성이 평생 품어야 할 외로움과 야망 사이의 갈등. 우린 조가,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여성이 외로움과 야망 중 무엇을 선택하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입 모아 말했다.



자본주의의 극복: 소중한 일상에 대한 세심한 포착



작품엔 반자본주의적인 서술이 다수 등장한다. “내가 보기엔 부자들도 가난한 사람들만큼이나 걱정거리가 많은 것 같아"라는 조의 말이나,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 같지 않니?”라는 메그의 말이 그렇다. 마치(March) 집안은 자본과 계급을 초월한 가치를 추구한다. 오래된 물건은 깨끗하게 손질하고, 드레스는 고쳐 입으면서 물건을 소중하고 대하는 방식이 특히 눈에 띈다. 이들의 소박한 삶이야말로 극단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생활 방식이지 않을까.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어차피 부와 계급은 상대적이고, 비교의 굴레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가치들이다.


동시에, 혹독하게 느껴졌다는 현진이의 말이 인상 깊었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허영을 반성하고 검소함만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매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고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고. 가족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부모로 인해 아동과 청소년인 자식이 노동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는 것 또한 찬성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소박한 삶에 가치를 두고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삶의 방식은 이 시대에 얼마나 절실한가. 작품 중에는 “겉으로 아무리 꾸며도 그 속에 들어있는 평범함을 감출 수 없다"는 서술이 있었다. 겉모습, 또는 겉으로 드러나는 지위와 계급에 따라 대우를 구분하는 세상에 내면의 평범함을 떠올리는 일은 중요하다. 사람의 내면은 누구 한 명만 특별할 수 없다.


작가는 아침 햇살이 잠든 자매의 모습을 비추는 장면을 공들여 서술한다. 고요와 평안, 평화로움, 잔잔한 행복이 흐르는 그 장면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쾌락이 아닌 평온. 예진님은 사람들의 기억을 글로 현상해주는 <기억현상소>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는데, 사람들이 현상하고 싶다던 기억은 특별하고 화려한 순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닷가에 앉아있었던 순간,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들어온 방 안에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광경. 삶의 충만함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 찾아온다. <작은 아씨들>은 일상의 모든 장면을 세심히 포착하고 서술하며, 자본을 극복한 삶이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보여준다.



새롭게 조명하는 베스



베스는 수줍어서 자매 중 가장 눈에 띄지 않았던 아이다. <작은 아씨들>을 읽을 때마다 늘 시선은 메그와 조, 에이미에게 향했다. 메그와 조, 에이미는 스스로 어떤 삶을 원하는지 소리쳐 말하지만 베스만큼은 말없이 웃거나 속삭이듯이 읊조리곤 했다. 메그는 장녀라서, 조는 가장 당차서, 에이미는 막내라서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는 베스에게 주목했다.


베스는 소리 없이 큰 존재감을 차지한다. 그 존재감은 상냥함과 꾸준함으로 이루어진다. 로렌스 할아버지에게도, 훔멜 부인에게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왕래하며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쌓았다. 베스의 영향력은 베스가 아프자 마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베스의 쾌차를 기원하고 떠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자매들은 가장 조용한 베스가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다는 것에 놀란다. 베스의 눈에 띄지 않는 친절함은 얼마나 강렬하게 사람들을 이끌었는가.


작가는 베스가 정성스럽게 인형을 대하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한다. 언니와 에이미로부터 버려진 인형을 고치고, 옷과 모자를 만들어 입혀주고, 식사 시간에도 함께 자리를 마련해준다. 이렇게 작가가 시간을 들여 묘사한 베스의 상냥함은 마치 집안의 안팎에 거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존재다. 베스는 조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었고, 에이미가 허영과 이기심을 반성하게 되는 모범적인 존재였다. 로렌스 할아버지에게는 위안을, 훔멜 부인에게는 격려와 도움을 주었다. 작고 조용한 삶이 주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다른 관점에서보면 유토피아적인 내용이었다. 검소한 삶 가운데 충만한 웃음과 평화. 일상의 평안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 묘사를 따라가며 작품을 읽는 내내 그 평화로움에 젖어들었다. 평화 속에 빠져들 수 있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받은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우리가 이미 행복을 누리기 위한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일러주고, 하나하나 눈 맞춰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듯하다. 오늘의 햇살, 또는 빗방울,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웃음, 대화, 포옹을 힘껏 만끽하게 된다. 


아마 어렸을 적에도 읽고 영화로도 관람해서 새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책의 잔잔한 서술은 예상치 못한 감각을 선사한다. 우리의 삶과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동시에, 돌이켜볼 수 있는 책.

매거진의 이전글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