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zoos May 17. 2023

우연이었다.

극장 + 지각 - 팔걸이 = ?


몰랐었다. 우연이었다.


나는 그런 걸로 작전을 짤 만큼의 인간이 아니다.


심지어 소개팅 이후의 첫 만남(흔히들 말하는 애프터)에서 그런 작전(?)을 짤만한 과감한 인간이 아니다.


우연이 좀 겹쳤달까?


소개팅 날짜가 잡혔는데 마침 가보고 싶던 식당이 있었다. 당시 막 떠오르는 이국적인 식당. 요즘엔 좀 흔해졌지만 그땐 그리 많지 않았고, 나도 별로 먹어본 적 없는 국가의 요리.


하지만 그 나라의 와인은 좀 마셔봤었기에 와인을 주문했고, 고기 요리와 해산물 요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스파라거스를 주문했을 때, 상대방이 활짝 웃었다.


"저, 아스파라거스 좋아해요. 하지만 이런 데서 그런 걸 주문하면 친구들한테 혼나곤 했어요. 굳이 야채 같은 걸 시키냐고. 아스파라거스 좋아하시나요?"


아마 아스파라거스 때문이었을 거다.


좀처럼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던 우리의 대화는 함께 래프팅 보트를 탄 것처럼 빠르고 급류에 흔들릴 때의 동료처럼 밀착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실 아스파라거스 보다는 와인때문이었을 거다. 활짝 웃는 그녀에게 다음 약속을 건넨 것은. 별로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는 그녀와 함께 한 병을 훌쩍 비우고, 두 병 째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멍청하고 한심하게도 지각이었다. 그것도 아주 심한 지각. 영화를 보기 전에 뭔가 요기를 하려고 약속 시간을 정했는데, 심지어 영화 시간에도 늦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전날의 과음으로 핸드폰을 잃어버린 상황(창피하지만 가끔 술을 많이 마시고 택시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리곤 한다). 쉽게 말해 연락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약속 시간에 늦게, 아주 많이 늦게 도착했다.


그녀가 기다려 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 헐레벌떡 극장 1층의 로비로 뛰어 들어갔을 때 활짝 웃어주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이미 불은 꺼져있었고, 어두운 불빛 속에서 예매해둔 - 미리 예매는 해놨다. 그 정도는 내가 해야하는 일이 아니던가! - 좌석을 찾았을 때,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되는 지각 때문에 미안한 것도 있었고, 바로 그 지각 때문에 전력으로 달려왔으니 숨이 가빠진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도 훨씬 큰 이유는 바로 그 좌석 때문이었다.


커플석이었다. 가운데 팔걸이도 없는, 말 그대로 커플석.


내가 예매했는데... 난 그저 빈 자리 중에서 화면이 잘 보일 것 같은 자리, 자막을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자리, 너무 앞 자리는 고개가 아플테니 좀 뒤쪽으로, 너무 뒤쪽은 화면이 작게 보일 수 있으니 가운데 쪽으로... 뭐 그런 종류의, 하지만 심각한 고민으로 결정한 자리였는데...


커플석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 내 머릿 속에 그런 좌석은 없었다. 영화관에 커플석이라니. 너무 오랜만에 극장에 온 건가. 커플석이라니. 도대체 커플석이라니.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된단 말인가. 내가 이걸 노리고 예매했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 아... 이게... 그러니까... 저도 몰랐..."


말을 길게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영화는 시작했고, 둘 다 보고 싶어했던 영화였고 - 영화는 정말 재밌었다. 오랜만에 보는 프랑스 영화였고, 인생 영화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영화였다. - 이제와서 돌아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몰랐었다. 우연이었다.


나는 그런 걸로 작전을 짤 만큼의 인간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소개팅은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번째 만남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 두 번째건 세 번째건 간에 - 그런 작전을 짤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야밤에 문득, 저 강남 한복판의 자그마한 극장 커플석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아마 십 년도 넘었을...


덧말.

가운데 팔걸이가 없다보니 반대쪽 팔걸이에 몸을 바짝 기대어 아주 불편한 자세로 영화를 봤다. '이건 절대 나의 의도가 아니였어요!'라고 온 몸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걸 그녀가 알아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2018년 1월의 Facebook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납딱사배기의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