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긴 교토 (5) - 06.25 / 낯 가리기 + 장보기
가와라마치역에 내려 카모강을 건넙니다. 뭐지? 이 묘한 반가움. 이 기분에 x100 정도 하면 고향에 돌아온 울컥과 비슷하려나. 캐리어를 끌고 약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면서 걷습니다. 아, 뭐 덥고 습하긴 하네요.
반갑다. 숙소! 에어비앤비로 구한 기온 뒷골목의 작은 방. 사진에 보이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주방과 작은 욕실이 있습니다. 1층엔 비건 라멘 가게와 코인 런더리가 있고, 2층엔 새벽 5시까지 영업하는 바가 있더군요. 교토의 가장 번화가 한가운데! 에서 살짝 뒷골목에 있는 숙소라 교토의 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후후
일단 교토에 왔으니 오랜만에 ’의식‘을 시작해 봅시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마츠바 본점으로 갑니다. 2층에 앉고 싶었지만 지하로 안내받았습니다. 바로 니싱소바를 주문합니다. 달달하게 간장에 조린 청어를 넣은 따뜻한 소바입니다. 교토에 오면 가장 먼저 먹는 음식입니다. 나의 위장에 ’이제부터 교토 음식 들어간다~‘하고 예고하는 거랄까요?
근데 부드러워야 할 니싱이 좀 딱딱합니다. 뭔가 변한 걸까? 흠...
뭐랄까, 오늘 밤부터 달리진 않을 겁니다. 않으려고 합니다.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의 교토는, 살짝 새침한 느낌이랄까요? 마츠바의 니싱소바가 그랬듯 제가 알던 교토와 조금은 다릅니다. 외국인이 원래 많던 도시이긴 했지만 유난히 중국어가 많이 들립니다. 눈에 익숙한 거리에 못 보던 건물이 들어선 곳도 있고요. 보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매일 달릴 체력이 없다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지만, 교토와 저는 낯가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긴 시간 동안 지낼 ‘방’과 친해지기도 할 겸 집에서 저녁을 차려 먹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니시키 시장 구경부터 했어요. 냉장고에 쯔께모노부터 채워 놓아야죠. 구석구석 니시키에서 판매하는 음식을 눈에 넣으며 걷습니다. 몇몇 가게는 돌아오면서 들르려고 찜 해놨고요.
니시키 시장을 통과해 이노다 커피 본점에 도착했습니다. 조만간 가벼운 아침을 먹으러 오게 되겠지만, 오늘은 디저트를 먹으러 들렀습니다. 아이스커피와 푸딩. 찐하고 달착지근한 설탕의 내음. 푸딩 맛있더라고요. 그래서 하나 포장도 해왔습니다. 집에서도 먹을라고요.
당 충전하고서는 본격적으로 장을 보러 갑니다. 사진엔 없지만 니시키 시장에서 유자 벳따라즈케와 아스파라거스 즈케를 하나씩 샀습니다. 숙소에 칼이 없을 것 같아서 벳따라즈케는 잘라서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니시키 시장 건너편으로 넘어가서 말 그대로 마트, 슈퍼마켓에 갔어요. 즉석밥, 즉석국, 치약, 쥬스, 마실 물, 과자 뭐 그런 것들을 샀어요(사진에 치약이 빠졌네;;). 보름쯤 되면 여행에서 조금은 생활로 넘어가는 단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집에서 쓰던 짱구 장바구니도 가져왔어요.
장바구니를 들고 카모강변을 걸었습니다. 살짝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 그리고 카모강변의 사람들. 교토가 조금은 저에게 마음을 열어 줍니다. 아, 내가 열어준 건가?
숙소로 돌아와서 땀에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시원하게 했습니다. 오늘은 다시 나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깐요. 에어컨이 방을 시원하게 식혀주고, 땀에 절은 몸을 씻어내고서, 저녁을 차리려고 장 본 것을 꺼내보니... 어라? 메인 요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아까 시장을 지나면서 오뎅 튀긴 것을 사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벳따라즈케 사다가 깜빡했네요. 어쩔 수 없죠. 그냥 밥이랑 국이랑 즈케로만 먹...
엥? 숙소에 밥그릇 국그릇이 없습니다. 물론 1회 용기 그대로 쓰고, 접시에 덜어먹고 뭐 그러면 임시방편이야 되겠지만, 보름이나 지내야 하는데 밥그릇, 국그릇 정도는 사도 되지 않을까요? 어라? 숟가락, 젓가락도 없네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시 나가서 사와야지;;;;
숙소에서 돈키호테가 멀지 않아서 일단 그쪽으로 가봅니다. 말 그대로 ‘잡화점’이잖아요. 하지만 그곳은 관광객용 잡화점이었습니다. 실생활용 잡화는 팔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이소를 검색해서 니시키 시장 입구에 있는 다이소로 이동. 필요한 것들을 모두 100엔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근데, 숙소에 다시 돌아와서 보니 숟가락, 젓가락, 칼 이런 건 있더라고요... 잘 찾아볼 껄...
다이소에서 나와 다시 니시키 시장으로 갑니다. 아까 까먹은 ‘메인요리’를 사려...는데 시장은 이미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그냥 즈케만으로 먹을까? 하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함박스테이크와 모즈쿠 사라다를 샀습니다.
그렇게 차려진 늦은 저녁 한 상. 편의점 음식은 생각보다 훨씬 훌륭했고(생각 보다요, 생각보다!), 아스파라거스 즈케는 기대에 훨씬 못 미쳤습니다. 풋내가 사라지지 않아서 절임 같은 느낌이 나질 않아요. 역시 응용편은 기본편에 익숙해진 다음에 시도를... 유자 벳따라즈케는, 기대한 만큼 엄청 맛있었어요. 완전 너무 좋아서 집에 갈 때 잔뜻 사가지고 가고 싶은데, 어떻게 포징해야 할지 지금부터 고민 시작입니다.
저녁을 차려먹고, 설거지를 하고, 이렇게 오늘 하루를 정리해 보니 이제 교토랑 낯 가리기는 그만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 내일도 친해지기는 힘들겠죠... 뭐 어떻습니까,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친해져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