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긴 교토 (20) - 07.06
분명히 오늘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것저것 정리하면서 좀 쉬고 며칠 전에 실패했던 비와코(琵琶湖)에는 내일 가려고 했었단 말이죠. 늦잠을 자고 일어나 창 밖을 보는데 유난히 화창합니다. '곧 흐려질 거야', '곧 비가 올 거야', '곧 날씨가 나빠질 거야'하면서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씻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밖은 화창합니다.
어? 이거 이러다 오늘 비 안 오는 거 아냐? 아, 장마철이라 대기가 불안정하구나. 일기예보가 딱딱 들어맞지는 않더라고. 오늘이 맑고 내일 비가 올 수도 있어. 그럼, 지금이라도 비와코에 가볼까?
그렇게 방을 나섰습니다. 산조게이한(三条京阪) 역에서 게이한(京阪) 선을 타고 게이한 야마시나(京阪山科)까지 간 다음, JR 야마시나(山科) 역으로 걸어갑니다. 고세이선(湖西線)을 타기 위해 플랫폼에 올라갔는데, 뭔가 수상한 공기가 느껴집니다. 열차들이 주르륵 연착되고 있습니다. 어딘가 열차 건널목을 점검하는 이슈? 뭐 그런 이슈로 고세이선과 도카이도/산요본선(東海道/山陽本線) 그러니까 비와코 주변으로 운행하는 노선들이 계속 연착되고 있었어요. 뭐 방법 있나요? 기다려야죠.
한참을 기다려 3번 플랫폼에서 오미마이코(近江舞子)행 열차를 탔습니다. 주말이라 비와코 쪽으로 놀러 가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열차는 한산합니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메인이네요. 음? 근데 토요일에도 학교를 가나요?
어쨌든 고세이선은 창밖으로 비와코가 보입니다. 며칠 전에 봤던 창밖의 비와코보다는 더 선명하게 잘 보이네요. 오늘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비와코를 내려다볼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느낌입니다.
시가(志賀) 역에 내려 하늘을 보니 여전히 화창합니다. 플랫폼에서 내려가 개찰구 옆에는 비와코 밸리가 영업 중이라는 안내도 붙어 있습니다! 오늘은! 비와코를 볼 수 있습니다!
시가역 앞으로 나가면 비와코 밸리 케이블카 탑승장까지 운행하는 특별 버스(?)의 정류장이 바로 보입니다. 그리고 해당 버스의 운행 시간은 비에이선 열차 도착 시간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 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오늘은 열차가 지연 운행을 하고 있다 보니 버스 운행 시간이랑 어긋났더군요. 바로 2분 전에 버스가 출발했더라고요. 그래서 30분 정도 시간이 붕 떠버렸습니다.
역 안 자판기에서 콜라를 하나 뽑아 먹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이렇게 버리는 30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가역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역 바로 앞에 조그만 길이 보여서 그냥 따라 걸었습니다. 멀리에 비와코가 보였거든요. 어쩌면 해변 아니 호변을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아니,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어요. 정말 조용하고 잔잔한 바닷가의 분위기였습니다.
비와코, 그러니까 비와호수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라고 합니다. 호수의 크기는 서울보다 크고, 호수의 깊이는 서해 바다보다 깊다고 해요. 호수에는 파도도 치고, 호수 안에는 해류 아니 호류도 흐른다고 합니다. 바다와 연결된 곳이 없을 뿐이지 주변 사람들에게는 바다와도 같은 곳이겠죠.
파도가 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까 신기합니다. 멀리서 보면 그냥 호수 같아 보였을 텐데, 바로 옆에서 보니까 이건 정말 바다 같아요. 과연 저 물은 짤까요? 호수니까 짜지 않겠죠? 떠서 마셔보질 않아서 그건 모르겠네요.
자, 버스 시간이 됐습니다. 아이폰 지갑에 등록해 둔 ICOCA 카드로도 탑승이 되길래 일반 버스인 줄 알았는데, 정류장이 시가역과 케이블카 탑승장 외에는 없는 특별 버스입니다. 이 정도면 오히려 비와코 밸리에서 셔틀버스를 운행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그런 버스.
그리고 드디어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했습니다. 울창한 나무 옆으로 케이블카가 매달려 있는 로프가 보입니다. 곧 저걸 타게 되겠군요.
엥? 티켓을 사러 갔더니 갑자기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의 눈앞에서 안내문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thunder storms' 때문에 운행을 중단한다고 하는 안내문. 이게 무슨 기묘한 운명입니까. 3일 전에 왔을 때에는 공사한다고 영업을 안 하더니, 오늘은 갑자기 번개 때문에 '내 눈앞에서' 운행을 멈춘다고?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일단 중지' 같은 뉘앙스였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나서는 '오늘은 운행 끝'으로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그럼 기다릴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다시 버스를 타고 시가 역으로 내려갔습니다.
교토로 돌아가는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비가 그치고 하늘이 점점 맑아집니다. 정말 반짝 비가 왔던 거였어요. 이런 날씨면 케이블카는 다시 운행을 재개했을까? 아냐, 이 정도면 케이블카가 나를 거부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도 비와코 밸리의 케이블카는 절대로 타지 않을 거야!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교토 방면 열차가 플랫폼 안으로 들어올 때 저는 반대편 플랫폼으로 넘어갔습니다. 오히려 반대쪽으로 올라가보자는 생각이었어요. 마침 오미마이코 역 부근에는 제가 미리 찾아두었던 보고 싶은 포인트들도 있었어요.
반대편 플랫폼에서 오미마이코행 열차를 탔습니다. 말 그대로 열차 안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좀 이상합니다. 한 여름의 토요일, 이렇게 멋진 경치를 가진 호숫가에 피서객들이 없다니요.
오미마이코 역에 부근에 보고 싶었던 포인트는 오미마이코(近江舞子) 해변과 츠키미 하마(月見浜). 역에서 서로 반대 방향이라 일단 가까운 츠키미 해변 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浜 하마도 해변이라는 뜻입니다)
비와코 밸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비와코를 내려다봤다면, 이런 풍경을 알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케이블카를 타지 못한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습니다. 비와코 주변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어요. 물도 너무나 맑더라고요.
썬크림도 바르지 않고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다 받으면서 츠키미 해변에 도착하니 너무 더워서 카키고리(かき氷) 깃발을 봤을 때 아주 반가웠습니다. 딸기 빙수를 하나 받아 들고 그늘에 앉아서 해변 아니 호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너무나 마음에 들더라고요. 마침 해변 주위에 민박집이 여러 개 보이길래 빈 방이 있다면 1박을 하고, 옷을 좀 사서 나도 물에 들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너무나 마음에 드는 해변 아니 호변이었어요.
여기까지 왔으니 가장 유명한 해변일 것이 분명한, 역 이름과 같은 이름의 해변인, 오미마이코에도 가봐야겠죠. 걸어 들어간 길을 따라 다시 오미마이코 역으로 나와서 이번엔 반대쪽으로 걸어갑니다.
작은 요트들의 주차장 아니 주선장인가요? 어쨌든 이런 곳은 처음 봤네요.
역에서 5분? 10분 정도 걸어가니 오미마이코 해변이 나타납니다. 마치 경포대처럼 해변 바로 뒤에 송림 그러니까 소나무 숲이 길게 펼쳐진 곳이었어요. 아, 해변이 아니고 호변이죠. 이거 너무 헷갈립니다. 여기가 바다인지 호수인지 ㅎㅎㅎ
이 호변이 엄청 깁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길어요. 호변 뒤에는 소나무 숲. 그리고 그 뒤에는 길이 있고 길 뒤에는 가게들이 있습니다. 가게에서는 음식을 팔기도 하고, 코인 락커를 빌려주기도 하고, 유료 샤워장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소나무 숲에서는 바베큐를 할 수도 있는데, 바베큐 비용은 1인당 500엔 정도고 비용은 각 구역(?)을 담당하는 가게에 지불하는 식 같았습니다.
여기로 오니까 사람이 꽤 있습니다. 헌데 아주아주 신기한 게, 대부분 서양인입니다. 근처에 미군부대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한국/일본/중국인이 없어요. 저의 느낌으로는 남미 사람들이 많은 느낌이었습니다. 울려 퍼지는 노래들이 그쪽 노래들이에요.
음, 개인적으로는 오미마이코 해변보다는 츠키미 해변이 더 좋았습니다. 아기자기한 느낌이랄까요.
경치들이 너무 좋으니까 기분이 업됐습니다. 좀 더 걸어보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했어요. 해변을 따라 3km 정도 걸으면 다음 역인 히라(比良) 역까지 갈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오미마이코 역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3 쯤 걸었을 때,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 정신을 차렸어요. 그래서 다시 오미마이코 역으로 돌아갔습니다. 히라 역까지 걸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렇게 다시 교토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먹을 때가 되었어요. 산조 게이한 역에서 숙소 방면으로 걸으면서 몇몇 가게를 들여다봤는데 모두 만석이더라고요. 교토에서 밥 먹기가 너무 힘듭니다. 사람이 많기도 하고,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받아 주질 않아요.
그렇게 숙소에 올라가려다가 1층에서 이상한 간판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게 있었나? 미하라 란도리(みはらランドリー)? 이거 라멘 가게 안 쪽에 있는, 내가 몇 번이고 빨래했던 그 코인 런더리 이름 아냐? 근데 왜 니혼슈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거지? 아게(揚げ)? 그리고 술(酒)이라고? 이 안에 이자카야가 있나??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 하나. 코인 런더리 옆에 닫혀 있던 철문! 그래서 라멘집을 지나 코인 런더리에 들어가 보니 철문 위에 종이로 붙여둔 '미하라 란도리'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여긴가? 하고 철문을 열어보니...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이자카야가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여기는 관광객이 없습니다. 마치 스피크이지 바처럼 입구를 모르면 못 들어오는 그런 가게인 건가! 보물을 발견한 기분으로 바에 앉아서 주문을 시작합니다.
오토시로 나온 그린 샐러드와 안주로 먹으려고 주문한 반찬(?) 3종입니다. 따로따로 주문할 수도 있는데 모듬 메뉴가 있길래 그걸로 주문. 가지와 포테이토 사라다까지는 잘 먹을 수 있었는데 저 빨간 녀석은 정체를 모르겠더라고요. 돼지나 닭의 내장으로 만들었을 거라는 짐작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게의 주력 메뉴 3종 중 하나인 서양풍의 네기도로와 아보카도. 사실 '네기도로'라는 말만 보고 참치살이랑 대파를 다져 넣은 마끼 위에 아보카도를 올리고 양식 소스를 얹어주나? 하는 생각으로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을 완전히 뒤엎은 메뉴. 아예 '밥'이 없고, 밥 대신 '빵'이 있는 메뉴였어요. 엄청 바삭하고 고소하게 구운 토스트 위에 참치살, 대파, 아보카도를 마요네즈에 버무린 소스를 올려서 먹는 음식입니다.
토스트를 너무 잘 구웠기 때문에 맛이 없을 수 없는 메뉴인데, 소스도 찰떡궁합입니다.
다음 메뉴도 가게의 주력 3종 메뉴 중 하나인 수제 슈마이. 주문을 하면 그때부터 찌기 시작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메뉴입니다. 대나무 찜기 안에는 완전 푸짐한 슈마이가 4개 들어 있어요. 겨자 소스에 찍어 먹으니 꿀맛이더군요.
주력 메뉴 중 나머지 하나는 이 가게의 대표 메뉴인 '반마리 치킨'이었어요. 옛날 치킨처럼 작은 닭 반마리를 통으로 튀겨주는 메뉴로 모든 테이블이 이걸 먹고 있더라고요. 치킨 강국인 한국에서도 자주 먹지 않는 치킨을 굳이 멀리 일본에서 주문하고 싶진 않아서,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개를 먹어 봤습니다.
사진은 찍지 않았지만 당연히 술도 마셨습니다. 생맥주도 마시고, 화이트 와인도 마시고, 니혼슈도 두 종륜가? 마셨습니다. 숨겨진 가게를 찾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완전히 숨겨진 것은 아니고, 코인런더리 반대편으로는 제대로 된(?) 입구가 있긴 합니다. 물론 이 입구가 있는 골목이, 엄청 외진 골목이고 막다른 길이라서 관광객들이 막 들어올 그런 길은 아니라서, 여전히 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가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