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긴 교토 (19) - 07.05 저녁과 밤
교토 교세라 미술관 2층에서 시원하게 휴식할 때,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숙소 근처로 돌아가면 다시 교토의 번화가로 가는 거죠. 며칠 동안 매일 보던 그 번화가. 다양한 국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특정 국가가 엄청 많은)의 관광객들, 예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식당들, 뻔한 메뉴들... 짧은 여행에서야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들이 긴 여행에서는 좀 지겨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어딘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런 건 정보가 없잖아요. 그래서 막무가내로 지도를 열어 마음에 드는 지하철 역을 하나 골랐습니다. 이유도 황당한 이유. 그냥 역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이치조지'라는 역을 골랐어요. 도쿄의 키치조지와 발음이 비슷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키치조지도 뭔가 한적한 느낌의 동네잖아요. 이노카시라 공원도 좋고요.
이치조지역은 정말 마음에 드는 작은 역이었어요. 물론 저는 교세라 미술관에서 버스를 타고 근처까지 와서 걸어왔지만요. 숙소로 돌아갈 땐 반드시 이 역에서 전차를 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동네가 정말 한적하더라고요. 말 그대로 진짜 사람 사는 주택가. 식당들도 많이 보였는데 아직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마침 점심 장사가 끝나고 저녁 장사가 시작되기 전의 브레이크 타임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무작정 카페를 찾아 걸었습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무작정 카페를 찾아 걷는다'는 것은 일본 여행에서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한국처럼 여기저기에 우후죽순으로 카페가 있지 않거든요. 그래서인가? 널찍한 자리를 차지하고 두세 시간 앉아서 작업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카페를 찾아 돌아다니면, 정말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해요. 겨우 찾은 카페가 너무 작아서 뭔가 작업할 것들을 펼쳐둘 수 없다던가, 아예 빈자리가 있는 카페가 없다던가, 아니면 근처에 카페가 없을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 보니 저도 한참을 걸었습니다. 오늘도 뙤약볕에 걸었어요. 결국 구글맵의 힘까지 빌려서 겨우 찾은 작은 카페입니다. 이름은 우드노트(Wood Note). 규모가 큰 카페는 아니었지만 마침 한 팀을 제외하고는 자리가 다 비어있었고, 그래서 용기를 내 아이패드를 꺼낼 수 있었습니다. 거리에 사람이 없었기에 금방 자리가 찰 것 같지도 않았어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교토의 전통 가옥을 한 번 그려보고 싶었거든요. 기와라던가 벽재의 나무들 때문에 다른 스케치들보다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작업. 아이스 카페오레를 마시면서 한 시간 반 정도 그린 것 같습니다.
그날 시작한 작업은 결국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비행기 기다리다가 완성했네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100% 그린 것이 아니고 사진을 찍은 다음, 그 사진 위에 레이어를 만들어서 사진 따라 그리는 겁니다. 저 그림 잘 못 그려요...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아까 봐두었던, 근처의 식당으로 걸어갔습니다. 모고코로야. 밖에서 봤을 땐 그렇게 큰 줄 몰랐는데, 엄청 큰 가게였어요. 주로 대규모 회식으로 찾는 가게였나 봅니다.
일단 이모 쇼츄 소다와리와 3종 생선회, 해물 샐러드를 주문해 두고 다음에 먹을 메뉴를 해석하고 있었어요. 헌데 먼저 나온 메뉴들이 ... 아... 이게 뭐죠. 생선회는 말라있고, 연어는 색이 변해 있었어요. 그래서 이후에 먹을 메뉴를 고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빨리 이것들을 먹어 치우고 이 가게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냥 먹지 말고 나가버리는 것은... 그런 것은 제가 할 수 없는 행동이었어요.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 그래서 야채를 다 먹진 않았지만 오토시와 생선회는 모두 먹었습니다.
가게를 나와서 2차로 어딜 갈지 한참을 걸었습니다. 아까 봐놨던 식당들을 다시 가봤더니 술을 마시기엔 묘한 식당들입니다. 그냥 정식으로 가볍게 밥 먹는 그런 식당. 그래서 다른 곳을 찾으려고 이치조지에서 그나마 번화한 거리를 습한 공기와 불편한 온도 때문에 부채질하면서 걸었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곳이 없었어요. 이치조지는 라멘으로 유명한 동네라서 라멘 가게가 많더군요. 이상하리만치 이자카야가 없더라고요.
결국 번화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면서 이치조지역에서 에이잔선을 탔습니다. 이제 이걸 타고 데마치야나기 역에서 케이한선으로 갈아타면 기온시조 역까지 갈 수 있겠죠. 그러면 번화가에서...
음? 데마치야나기 역에서 갈아탄다라? 그렇다는 얘기는 데마치야나기 역에서 기온시조역까지는 쉽게 갈 수 있다는 얘기고, 그 지역은 최소한 '환승역'이 있는 동네니까 이치조지보다는 번화하겠네? 시조 도리의 번화함과는 다른 동네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고, 결국 데마치야나기 역에서 케이한 선으로 갈아타지 않고 역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치조지보다는 번화한 곳이었어요. 사람도 많고요. 거리도 훨씬 크고 건물도 더 높고요. 여기저기 펍이나 이자카야, 이탈리안 레스토랑 뭐 그런 곳들도 있더라고요. 근데 이상하게 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땀을 너무 흘려서인가? 컨디션이 나빠져서 까칠해졌나? 도대체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스스로에게 짜증이 쌓여갔고, 그냥 방으로 돌아가자! 라는 마음으로 다시 역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에 걸려서 건널목에 서 있을 때 저 작은 간판이 보였습니다.
와인과 세계의 요리 그리고 치즈. 다섯 건물만 더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거다! 뭔가 운명 같은 게 느껴졌어요. ㅋㅋ 이러면 엄청 대단한 식당을 만나게 될 것 같지만, 뭐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오늘은 여기다! 싶은 느낌.
작은 가게였습니다. 아주머니 혼자서 직접 요리하시는 작은 가게. 와인 메뉴는 모두 종이에 직접 손으로 쓰셨고, 칠판에는 요리 메뉴가 적혀 있었습니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은 편하게 메뉴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어요. 번역기를 쓰다가 잘 안 되는 곳은 직접 여쭤보면서 메뉴를 골랐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시킨 것이 건포도가 들어간 빠떼. 빠떼를 빵에 발라 먹으면서 화이트 와인을 두 잔 마셨습니다. 프랑스의 샤르도네와 이태리의 화이트. 첫 번째 마신 프랑스 것은 이상하리만치 상큼하고 가벼웠어요. 이게 샤르도네라고? 싶은 깜짝 놀랄 가벼움. 그러고 보면 이번에 여행 와서 마신 프랑스의 샤르도네들은 모두 경쾌하네요. 제가 싫어하는 샤르도네 특유의 찝찔함이 없었어요.
그다음으로 콩과 간 돼지고기 스튜를 주문했습니다. 이걸 먹으면서 '아, 이런 게 서양의 가정식인가?'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유럽에 가본 적이 없고, 그런 나라의 가정식 같은 건 더더욱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걸 보고 그렇게 얘기하나 보다 싶은, 그런 정겨움과 따뜻함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음식과는 조금 다른 그런 맛있음. 그래서 너무 마음에 드는 식당이었습니다.
이걸 먹으면서 레드를 두 잔 마셨습니다. 호주의 까쇼와 스페인의 레드. 호주의 까쇼는 생각보다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라서 놀랐고, 스페인의 레드는 와인 리스트의 글라스 와인 중 가장 싼 녀석이었는데 역시나 좀 단 맛이 먼저 치고 오는 저렴한 느낌입니다. ㅎㅎ
가게 이름은 아슈크루크(アシュクルク). 영어로는 ashkurk라고 쓰는 것 같은데 뜻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여튼 데마치야나기 역 근처에 있는, 따뜻한 가게였습니다. 번화가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하루였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었는데 마무리가 너무 좋았어서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