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긴 교토 (21) - 07.07
원래 오늘은 비와코(琵琶湖)를 보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지만 어제 열심히 돌아다녔기 때문에 무계획의 하루가 추가되었습니다. 어젯밤,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오늘 뭐 할지에 대해 고민해 봤는데요. 역시 이렇게 더운 여름날의 여행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최고다! 라는 결론을 내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구글맵을 켜고 교토 근처의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들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 오사카(大阪) 남쪽의 항구도시 사카이(堺) 시에 알폰스 무하(일본에서는 알폰스 뮤샤라고 쓰는 듯) 미술관이 있는 걸 찾았습니다. 왜 이런 도시에 뜬금없이 알폰스 무하의 미술관이 있는 걸까? 의아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저에게 약 세 가지의 이유로 오늘 일정에 딱! 인 곳이었기 때문이죠.
첫째, 멉니다. 멀다는 얘기는 가고 오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란 얘기고 그건 오늘 하루를 통으로 날릴 수 있다는 의미죠. 다른 스케줄을 또 계획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둘째, 열차를 타고 갑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당연하게도 버스나 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은 시원합니다. 견디기 힘든 더위와 습기를 겪어야 하는 건 야외에서 걸어 다닐 때죠. 그래서 먼 길을 이동하는 동안 열차를 타고 있다는 것은 큰 장점입니다. 게다가 열차 여행이라는 낭만도 더해지니 그것은 보너스죠.
셋째, 미술관입니다. 가고 오는 길만 시원한 게 아니라 관람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원한 곳입니다. 보통 미술관에 가면 두 시간 정도는 바깥세상을 잊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이유, 제가 알폰스 무하를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화가를 한 명 꼽으라면 무하를 꼽을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사카이로 갑니다. 아, 뭐 사실은 오사카의 부속 도시 같은 곳이긴 하지만요.
사카이시(堺市) 역까지 가는 코스는 꽤나 복잡했습니다(참고로, 사카이 역과 사카이시 역은 서로 다른 역입니다). 우선 숙소 앞의 기온 시조(祇園四条) 역에서 게이한 본선(京阪本線)을 타고 교바시(京橋) 역으로 갑니다. 교바시 역에서 오사카 순환선(大阪環状線)을 타고 덴노지(天王寺) 역으로 가서 한와선(阪和線)으로 갈아타면 사카이시 역까지 갈 수 있더라고요.
어제, 오늘 게이한선을 타면서 역시 오사카 쪽을 오갈 때 한큐 열차를 타는 것이 좀 더 낭만적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하게 취향 같은 것입니다. 게이한 열차가 세련된 신식 느낌이라면 한큐 열차는 클래식하고 정감 가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그냥 영화 때문에 생긴 선입견 같은 걸지도 모르지만요.
교바시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면서 선거유세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딱! 그런 장면이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선거유세 장면도 크게 다르지는 않죠. 그래도 뭔가 신기한 느낌이었어요.
사카이시 역에서 출구로 나오자마자 이런 표지판을 볼 수 있었어요. 이 역에 내리는 관광객(?)은 모두 알폰스 무하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처음 본 사카이라는 도시는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깔끔한 작은 도시의 느낌. 근데 제가 아까부터 작다, 외진 곳이다 뭐 그런 느낌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인구가 80만이 넘고 오사카에 바로 붙어 있는 위성도시라서 그렇게 작은 도시도 아니고 외진 도시도 아닙니다. 그냥 이름을 못 들어본 도시 정도겠네요.
사카이시역에는 벨마쥬 사카이(Belle Marge Sakai)라는 쇼핑몰이 연결되어 있더라고요. 거기 4층에 있는 사이제리야라는 이탈리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가볍게 먹었습니다. 새우가 들어간 무슨 샐러드랑 시금치와 버섯 파스타였는데, 생각보다 둘 다 양이 많더라고요. 그냥 파스타만 먹을껄 하는 후회와 함께 음식을 남겼습니다. 음료는 하나를 주문하면 무한 리필이 되더군요. 직접 음료코너에서 각종 탄산음료를 골라서 받아다가 마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결제가 셀프'라는 거예요. 결제를??? 셀프로? 주문하고 나면 자리에 주문표? 영수증? 같은 것을 가져다주는데요. 나갈 때 그 주문표를 가지고 카운터로 가서 바코드를 스캔하면 계산해야 할 총액이 표시됩니다. 그러면 카드로 계산하면 돼요. 다들 알아서 잘 계산하더라고요. 저도 처음 해보는 거였지만 헷갈리지 않고 결제했습니다.
알폰스 무하 미술관은 쇼핑몰 건물에 같이 붙어있는 느낌입니다. 다른 미술관들처럼 별도의 건물을 가진 미술관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미술관 건축을 보는 즐거움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부에서는 '촬영 가능' 푯말이 붙어있는 것들만 촬영할 수 있고, 작품들은 모두 촬영 불가였습니다. 촬영 가능 푯말이 붙어 있는 건 대부분 레플리카도 아니고 그냥 인쇄물 같은 것들이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전시가 시시했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알폰스 무하를 좋아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감동을 받을 만큼 엄청난 전시물들이 가득했습니다. 왜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사카이라는 도시에 이 정도의 소장품을 가지고 있는 알폰스 무하의 미술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사카이 출신의 재력가가 알폰스 무하의 팬이었...겠죠?) 정말 엄청난 수량의 소장품이 있더군요.
무하의 터치가 느껴지는 실제 연습 스케치라던가, 책에 넣을 삽화를 석판화로 만들기 전에 그린 그림이라던가, 그 삽화가 들어간 책들이라던가... 흔히 알고 있는 유명한 일러스트들의 레플리카가 잔뜩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먼 길을 왔는데, 그 시간과 노력이 절대 아깝지 않을 정도의 전시였어요. 아, 물론 무하의 팬이 아니라면 시시한 전시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건물의 2층에 매표소와 샵이 있고, 3층과 4층이 전시실인데, 중요한 전시는 4층이고 3층에는 유명한 일러스트들의 레플리카와 일러스트를 크게 인쇄해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꾸며둔 장식들이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전시의 규모는 작아서 모두 돌아보는 데 한 시간 정도면 충분했지만, 최애를 직접 만난 팬의 감동이 가시질 않아서, 결국 전시를 보고 나오다가 약 3천엔 정도 하는 도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술관 앞에서 지도를 열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더군요. 네, 여기는 오사카 부니까 이 바다는 오사카만이겠네요. 그러고 보면 저는 아직 오사카만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까지 온 김에 오사카만을 한 번 보고 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바다 방향으로 걷다가... 걸어도 걸어도 지도 위에 표시된 나의 위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음? 지도의 축척이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확인해보고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고 바로 버스 노선을 검색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약 10개의 정류장을 지나 사카이 역으로 왔습니다. 사카이시 역은 JR이고 사카이 역은 난카이선이 다니는 역입니다. 어쨌든, 사카이역에서 바다 방향으로 걷습니다.
그늘이 없어서 뙤약볕을 그대로 맞으면서 15분? 20분 정도 걸었습니다. 오늘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저의 여행 스타일이 그런 걸까요? 오늘도 무작정 걷다가 결국 온몸이 땀범벅이 됩니다.
그렇게 걸은 이유는 이걸 목적지로 찍어뒀기 때문입니다. 구 사카이 등대(旧堺燈台). 그냥 오사카 만을 보고 돌아가자! 라고 해버리면 중간에 '바다 봤으니 됐다'하고 포기해 버릴 것 같아서,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겨두려고 등대를 목적지로 했습니다.
한신 고속도로가 지나는 다리 밑 그늘에 앉아서 20분 정도 쉬었을까요? 자, 이제 슬슬 저녁을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물론 뙤약볕을 맞으며 15~20분을 다시 걸어야 했죠...
사카이 역 바로 앞의 리트로보(RITROVO)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입니다. 오사카 출신의 친구가 소개해준 가게예요. 거의 가게 오픈하자마자 들이닥쳤더니 제가 첫 번째 손님이라 자리는 많았습니다. 역시, 여기는 번화가와 다릅니다.
우선은 생맥주를 한 잔 주문하고 나서 메뉴판을 공부합니다. 특이하게도 한 여름에 석화를 취급하네요? 아마 삼배체처럼 여름에 먹을 수 있는 품종인가 봅니다. 맥주를 다 마시기 전에 굴이 나와버려서 급하게 화이트 와인을 한 잔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전채 모듬과 로스트비프를 주문했어요. 전채 모듬은 아주 가성비가 좋은 메뉴였고요. 로스트비프는 소금을 잔뜩 뿌려서 좀 짜긴 했는데, 금방 익숙해졌어요.
스파클링 칵테일이 있길래 카시스를 이용한 칵테일을 한 잔 마셨고, 화이트 와인도 추가하고, 레드 와인도 두 잔 정도 마신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가성비가 아주 좋고, 화이트 3종 레드 3종을 글라스 와인으로 마실 수 있어서 혼자도 충분히 좋은 가게였습니다. 멤버가 좀 더 있었다면 보틀을 시켜서 이것저것 음식도 시켜 먹고 싶은 그런 캐주얼한 가게였어요. 말 그대로 술 먹기 딱 좋은 가게.
뙤약볕을 걸어서 온몸이 땀에 절은 채 입장했을 때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주시고 냉풍기도 저를 향해 틀어주시면서 추우면 얘기해 달라고 하시던 친절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교토까지 가는 열차는 늦은 시간까지 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2차도 가볼까? 싶어서 역시나 친구가 추천해 준 이자카야를 찾아 걷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사카이는 꽤나 매력적인 곳이었습니다.
아, 하지만 소개받은 이자카야는 동네의 인기 이자카야였네요. 이미 만석입니다. 구글 리뷰에도 자리 잡기 어렵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교토로 돌아갈 때 한큐 열차를 타기 위해서 코스를 체크해 보니, 사카이 역에서 난카이 난바(南海なんば) 역으로 간 다음 난바(なんば) 역에서 미도스지선(御堂筋線)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난바 역은 엄청 다양한 지선이 만나는 역이라서 지하도가 아주 넓고 복잡합니다. 자기가 어떤 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표지판을 따라가야 해요.
미도스지선을 타고 우메다(梅田) 역에 도착하면 이제 한큐 열차를 타러 가야 하는데, 역 이름은 오사카 우메다(大阪梅田) 역이지만 어차피 지하에서는 알 수 없으니까 한큐 열차라는 표지판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중간에 저는 한신을 따라가서 엉뚱한 곳에 다녀왔습니다.
오사카 우메다 역은 한큐 열차가 출발하는 역이라서 플랫폼에서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노선의 열차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사진에는 잘 안 담겼는데 이거 좀 장관입니다.
오사카 우메다 역에서 교토 가와라마치 역으로 가면서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한큐 열차의 내부를 잠깐. 쓸데없이 문과 벽에 사용한 저 나무 질감의 배색, 거기에 더해서 문과 벽은 또 다른 색이죠. 바닥에도 굳이 안 해도 될 바둑무늬의 문양 등... 어딘지 모르게 게이한 열차와는 다른 한큐 열차만의 감성이 느껴진단 말이죠...
방에 들어가면서 편의점에 들러 가리가리군을 두 개 샀고, 키위맛 사와를 사서 한 캔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흠... 이제 여행이 끝나가고 있네?'라는 생각이 문들 들어서 일까요? 결국 밖으로 나왔습니다.
숙소 앞에 있는 이로도리(彩り)에서 가볍게 쿠시카츠 3개랑 오징어 구이를 먹고 있으니 곧 가게 닫을 시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추가로 쿠시카츠 6개를 주문해서 포장을 했습니다. 방에 올라와서 친구에게 선물 받은 쇼츄와 함께 혼자 신나게 마셨습니다.
내일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서 아무런 스케줄이 없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마실 니혼슈 한 병 정도 그리고 조카 선물을 쇼핑하고 나서 돌아갈 짐을 싸야죠. 그래서 오늘은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