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생일맞이 가고시마 여행 #11 - 시로야마 호텔 스이렌
오랜만의 여행이라서 그랬을까요? 여행의 첫날, 늦은 시간까지, 너무 많이 마셔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여행의 두 번째 날은 온전히 푹 쉬는 하루가 되었죠. 온천에 몸을 담그고,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점심도 거르고 비타민 음료와 이온 음료로 버텼어요.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았습니다.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로비의 컨시어지에 내려가서 호텔 레스토랑에, 지금 바로 가서 식사할 수 있을지 확인해 봤습니다. 시로야마 호텔에는 레스토랑이 아주 많거든요. 그중에 스이렌(城山ガーデンズ 水簾)이라는 곳으로 물어봤습니다. 쿠로게와규 스키야키(黒毛和牛すき焼き)나 쿠로부타 샤부샤부(黒豚しゃぶしゃぶ)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타베로그 평점이 높은 곳은 프렌치 레스토랑인 Le Ciel이나 테판야키 쿠스노키(鉄板焼 楠) 같은 곳이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거기에 비해서 스이렌은 향토 요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좋았고, 가격도 많이 비싸지 않았어요.
다행히 바로 식사가 가능하다고 해서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며 고민을 했어요. 스키야키냐 샤부샤부냐.
제가 알기론 가고시마도 간사이식 스키야키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달콤한 소고기를 먹을 수 있겠죠. 하지만 가고시마 쿠로부타를 얇게 썰어 육수에 익히면 고소한 지방의 맛이 극대화되는 샤부샤부를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샤부샤부가 이겼습니다. 가고시마의 와규도 유명하지만 역시 가고시마 하면 쿠로부타! 따뜻한 육수에 고소한 돼지고기를 익혀 먹으면 컨디션이 좋아질 것 같았습니다.
쿠로부타 샤부샤부 코스도 몇 가지 종류가 있더군요. 그중 가장 비싼 것이 키리시마(霧島)의 쿠로부타를 사용한 것이었어요. 기왕이면 맛있는 것으로 먹어보자 싶어서 그걸로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음료는 일단 샴페인을 한 잔. 퀄리티가 꽤 좋은 샴페인이었어요. 하지만 이 한 잔도 다 마시지 못했습니다. 진짜로 컨디션이 안 좋았어요.
코스의 시작은 애피타이저 3종이었습니다. 도미나 잿방어 등의 생선을 튀기고 새콤달콤한 소스에 적신 생선 난반과 두유향이 강해서 고소했던 두유 두부 그리고 제가 참 좋아하는 해초인 모즈쿠입니다. 모두 맛있었어요.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죠.
다음으로 나온 것은 사시미 3종. 혼마구로(참다랑어), 마다이(참돔), 미즈이까(무늬오징어)입니다. 신선한 사시미들. 역시 가고시마는 해산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사츠마아게도 나오는군요. 하나는 당근을 넣은 것, 다른 하나는 연근을 넣은 것입니다. 참고로 사츠마아게(さつま揚げ)는 어묵의 일종입니다. 어묵의 분류 중에서 튀긴 것을 사츠마아게라고 하는데요. 가고시마가 그 원조라고 합니다. 사츠마는 가고시마의 옛 지명이죠.
드디어 샤부샤부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육수를 올린 인덕션의 화력을 올리고, 야채들을 먼저 넣습니다. 야채들의 숨이 죽고, 육수가 끓어오을 때 키리시마 산 쿠로부타의 고기를 집어 들어 육수에 담갔다가 꺼내서 입에 넣으면, 가고시마 쿠로부타 그러니까 버크셔 종 특유의 그 고소한 기름이 사악~ 퍼집니다.
샤부샤부용 고기는 등심, 목살, 삼겹살로 총 세 부위가 나오는군요. 등심의 씹는 맛도 좋고, 목살의 밸런스도 좋은데요. 역시 지방의 고소함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건 삼겹살이 아닌가 싶어요. 아, 아닌가? 목살도 고기와 지방의 밸런스가 절묘해서 너무 맛있습니다. 네, 맞아요. 이건 뭐가 더 좋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냥 다 맛있어요. 제가 가고시마에 올 때마다 쿠로부타 샤부샤부를 먹는 이유입니다.
아마 살짝 덜 익혀서 핑크빛이 돌 때 먹는 것이 더 맛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푹 익혀서 먹는 편입니다. 지방이 충분히 녹아야 고소한 맛을 더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좋은 고기는 잘 익었을 때 진짜 그 고기의 맛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느덧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의 시간입니다. 디저트는 팥으로 만든 무언가가 나왔는데요. 이걸 아이스크림이라고 해야 할지 푸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스크림의 질감이라고 하기엔 푸딩 같은데, 푸딩이라고 하기엔 아이스크림의 맛이 나거든요. 여튼 맛있는 디저트였습니다.
이렇게 잘 먹고, 컨디션이 바로 회복 됐으면 드라마틱하고 좋았겠습니다만 여전히 컨디션이 안 좋아서 다시 침대에 누웠습니다. 방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려두고, 땀을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