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재정의
(에곤 실레의 '헌신'이라는 제목의 작품)
참으로 오랫동안 누군가가 내게 헌신하는 것을 꿈꿔왔다. 내가 꿈꿨던 것은 변하지 않는, 상대가 떠날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었을까.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아 두면 내가 매력적일 때도, 매력적이지 못할 때도 항상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원했던 것일까.
그러나 사람도, 사랑도, 항상 변하는 것이다. ‘Change is the only constant (변화만이 변함없는 상수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맛을 내는 발효 음식처럼 숙성할 수도 있고, 아주 변질되어 못 먹을 정도로 부패할 수도 있다. 변화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지만, 숙성하는가 부패하는가는 어느 정도 우리 손에 달려있는 문제다.
지금의 연인 A와 함께한 지 7 개월이 다 되어간다. 우리 관계의 만트라는 처음부터 ‘the circle of spoiling each other (의역하면 ‘서로를 편안하게 해 주고 잘해주는 선순환’)였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를 아껴주며 관계를 숙성시켜 왔지만, 우리는 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서로에게 ‘헌신’하는 연인 관계는 아니다. 연애 초반에 우리가 나눈 관계에 대한 대화는, ‘서로 남자 친구 여자 친구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그 역할에 맞는 행동을 기대하기보다는 그냥 A라는 사람 그대로를 알아가고 싶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간의 로맨스만큼 우정 역시 중요시하는 연인이 되기로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토록 원했던 ‘헌신’이라는 딱지가 붙었던 그 어떤 이전의 연애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다.
지금의 연애가 예전보다 행복한 건 과거의 연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내가 연애에 걸던 기대에 있을 것이다. 상대의 헌신을 꿈꾸던 나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좋은 순간 그대로를 즐기기보다는 상대가 ‘헌신하는 연인상’에 얼마나 충실한 지, 내 낭만적 환상을 얼마나 충족시켜 주는지에 연연했던 것 같다. 상대 역시 그만의 욕망이 있는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을 채워 주어야 하는, 박제된 인형처럼 한결같은 사람임을 기대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폭력적인 기대였던 것 같다.
지금이 행복한 이유는, 상대가 내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행동이 ‘남자 친구라서 응당 해야 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럴 의무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정 내게 잘해주고 싶어서 우러나오는 행동으로 느껴져서가 아닐까. 타인에게 이유 없이 잘해주고 싶은 감정은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인가.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이,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나와 함께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시간을 들여 서로를 알아가고, 한 겹 신뢰가 쌓여갈 때마다 한 꺼풀 내 껍질을 벗고 좀 더 날 것의 서로를 보여주고, 그 모습 그대로를 예뻐해 주는 것은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가. 자라면서 각종 미디어로부터 ‘낭만적 연애’라며 주입받은 환상 속의 장면들을 걷어내고 나서야, 진정으로 낭만적인 순간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베를린 친구들 중엔 다자 연애를 실천하는 폴리아모리 (polyamory) 친구들이 꽤 있다. 혹자는 폴리아모리가 그저 허울 좋은 바람둥이이며, 연인에게 상처되는 행동을 하고 헌신을 기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개중엔 분명 폴리아모리의 이름을 그렇게 남용하며 연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무책임한 인간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만난 폴리아모리 친구들은 그 누구보다 오랜 연인에게 헌신적인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에게 헌신이란 단순히 상대 이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친구들에게 헌신이란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물어봤다.
H: 관계 내에서 나의 행동과 의사소통에 책임을 지는 것. (Taking responsibility for my actions and communication within that relation.)
AS: 지속해서 상대를 위해 나타나 주는 것. 상호 의존적 관계보다는 상호 지지적 관계. (Consistently showing up for each other. Co-supportive rather than co-dependent.)
K: 능동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관계에 투자하겠다는 의지를 소통하는 것.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상대의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그대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Actively expressing affection and the will to invest in a relationship. Actively trying to see and love them for who they are, not who I want them to be.)
(참고로 AS와 K는 함께 살고 있는 헌신적 연인 관계이며, 역시 폴리아모리이다.) 현재 나 자신을 폴리아모리로 규정하고 있진 않지만, 이 친구들에게서 독점 연애에 제한된 의미의 헌신이 아닌, 새로운 의미의 ‘헌신’을 배우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세상의 여러 언어들을 나의 언어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 건강, 사랑과 같이 내 평생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언어들은 시간을 들여 고민해보고, 내게 맞는 형태로 빚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헌신의 뜻은 무엇일까. 재정의 해보았다.
1. 내 욕망의 투영이 아닌, 그 사람 그대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2. 물리적으로던 감정적으로던,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
3. 진솔한 대화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상대가 되어주는 것. 때론 어려운 대화일지언정.
4. 상대의 욕구를 내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는 것. 그러나 상대를 위해 나의 한계를 넘지 않는 것. 상대를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잘 보살피는 것.
5.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말과 행동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을 것.
헌신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연인에게 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러한 헌신적 사랑을 줘 본 적이 있는가? 나는 항상 나 자신 그대로를 인정해 줄 수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일 때 나 자신을 괴롭히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는 친구였는가? 나는 나 자신과의 어려운 대화를 오랫동안 회피하지는 않았던가? 나는 내 욕구를 항상 잘 보살펴주는가, 아니면 때론 일이나 타인을 우선시하며 내 욕구를 방치하는가? 내가 내 몸과 마음을 대하는 말과 행동에 항상 존중이 있는가? 부끄럽게도, 나는 때로 나 자신을 타인보다 못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앞으로 몇 년간 그 어떤 연인에게 헌신하기 이전에 나 자신에게 가장 헌신적인 연인이 되자고. 나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알아주고, 보듬어주고, 나 자신과 때론 불편할 수 있는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해주자고. 이렇게 나 자신과의 헌신적인 관계를 통해서 나는 타인 역시 더 잘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