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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관계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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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가테 Jul 03. 2020

연애의 본질을 알아보는 법

프록시와 본질

“애인이랑 연락 얼마나 자주 해?” 

“관계 정의는 했어?”  

“그 사람 무슨 일 하는 사람이야? 대학은 어디 나왔어? 얼마나 벌어?” 

“애인한테 어떤 선물 받았어?”

“그 사람 집안은 어때? 부모님은 뭐하셔?”

“인스타에 둘이 찍은 사진 올렸어? 페북에 연애 상태 변경했어?”


내가 새로운 연애를 누군가에게 말할때 많이 들어 본 질문들이다. 사실 저 중 몇 몇 질문은 스무살, 연애가 새롭고 헷갈리던 때 내가 다른 이의 연애에 해 본 질문이기도 하다. 내가 질문했던 의도는 내가 과연 올바른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과연 진정으로 사랑받는 연애를 하는 것인지, 등의 관계 불안을 다른 이들의 연애와의 비교를 통해서 해소하고자 함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연애에 대해 물을 때는 아마도 나의 새 연애 상대가 과연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고싶은 궁금증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저 질문들은 연애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연애 상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들이었는지 판단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됐다. 나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줬던 연인이 내게 연락을 가장 자주 했다. 그의 연락 빈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척도라기 보다는, 그 사람이 그냥 원래 연락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한가한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를 줬을 뿐이었다. 부모님이 불화 없이 오랜 기간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던 사람들 중 가장 감정적으로 방황하던 사람도 있었고, 부모님이 어린 시절 이혼했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더 성장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 역시 깊은 사람이 있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항상 밥값도 자기가 내고 내게 선물도 많이 줬지만 감정적으로는 별로 받은 것이 없는 관계도 있었고, 학생이라 돈은 없었지만 나를 가장 풍요롭게 채워준 사람도 있었다. SNS에 가장 연인 사진을 올리고 싶었던 때는 연인과 가장 행복했을 때 보다는 SNS에의 공인을 통해 묶어두고 싶고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이 연애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었던 때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모든 질문에서 ‘내가 이 연애에서 뭘 느끼는지’에 대한 척도는 하나도 없었다. 


네이버 검색 결과

네이버에 ‘프록시proxy’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정의가 이렇게 나온다. 1.대리(권), 2.대리인, 3. (측정/계산하려는 다른 것들을 대표하도록 이용하는) 대용물. 3번 정의가 특히 흥미롭다. 세상에는 지능, 능력, 사랑 등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추상적인 가치가 있고, 보통 사람들은 그 추상적인 개념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프록시를 만든다. 예를 들면, 만나는 모든 사람의 지능을 측정하기 어려우니 그 사람의 학벌을 프록시로 지능을 판단하고, 사회성, 창의성을 포함한 실제 업무 능력을 단시간에 판단하기 어려우니 그 사람의 직업과 수입을 프록시 삼아 판단하는 식이다. 사랑의 크기를 판단하는 수많은 프록시 중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연락 빈도, 선물의 가격, 관계 정의, SNS상의 공인 등이 있고, 연애 상대의 가치를 판단하는 수많은 프록시 중에는 그 사람의 수입, 재산, 키, 몸무게 등이 있다. 

그러나 프록시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비슷해보이는 대용물일 뿐 본질과는 다른 것이고, 실제로 통계학 프로그램을 돌려보면 놀랄만큼 프록시들이 본질을 예측하는 힘이 상식과는 달리 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본질이 아닌 프록시로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졌을까? 그게 훨씬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본질은 대부분의 경우 그 상대를 관찰할 시간이 어느정도 주어졌을 때 파악할 수 있고, 우리는 물리적으로 모든 사람의 본질을 시간을 들여 파악할 수 없다. 회사의 인사팀이 채용할 때 모든 구직자와 일해보고 결정할 수 없으니 학벌이라는 프록시에 기대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사람들의 첫 필터링을 통과하는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서도 프록시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내 본질을 보여줄 기회조차 얻기 힘드니까.

그리고 아직 절대적인 경험치가 누적되지 않았을 때는 세상의 상식, 즉 프록시에 밖에 기댈 곳이 없다. 예를 들어, 아동기에는 아직 혼자서 결정할 수 있을만한 토대가 되어줄 경험의 양이 부족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위한 사회화 과정이 꼭 필요한 발달 과정이기 때문에 세상의 상식을 열심히 배워야한다. 

또한, 본질은 항상 또렷한 흑과 백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현대 사회에서 프록시는 우리의 판단력에 대한 불안감에 확신을 던져준다. (그게 옳은 확신이던 아니던.) 이런 확신이야말로 프록시를 매력적인 판단 기준으로 만들어준다. 특히 사람의 가치에 대한 프록시는 사람과 사람을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하게 만드는데, 다른 이와 비교했을때 내가 우월한 프록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일시적인 쾌감을 선사하고, 이러한 일시적인 우월감에서 오는 쾌감은 금방 또 사라지기 때문에 중독성이 강하다. 내가 누군가보다 프록시가 높아서 느끼는 우월감은 반드시 누군가보다 낮아서 생기는 열등감과 뗄 수 없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낀 뒤 더더욱 다시 우월감을 느끼려 프록시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프록시와 본질을 동일시하고 그 둘을 혼동하면 더욱 더 행복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게된다. 프록시의 기준이 미달이 되면 본질에 관계 없이 불안감과 열등감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참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짧은 학벌이 부끄러워질 수도 있고, 정말 매력적이고 인기가 많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인스타그램의 모델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내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나랑 애인은 정말 하루 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친구가 애인의 직업을 물어보는 순간 갑자기 내 연애가 타인의 눈에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서 위축되기도 하고, 반대로 정말 너무 허무하고 자존감을 갉아먹는 연애이지만 애인의 외모와 스펙이 흠 잡을 데 없어서 ‘내가 감히 이런 사람을 놓쳐도 되는걸까’라는 생각에 헤어지기를 망설이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프록시와 본질을 구분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장 첫번째로 할 수 있는 노력은 내가 여태까지 학습한 상식적 판단 기준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좀 더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연락 빈도, 만남 횟수, 선물의 가격 등 이 모든 상식적 잣대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내 연애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내가 연애를 통해 행복하고 삶이 앞으로 나아가는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마치 인상파 화가가 사물에 대한 상식을 기반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 날,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치열하게 관찰해서 자기가 본 모습 그대로를 그리듯, 상대와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좀 더 치열하게 해야한다. 

이 노력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조금 더 구체적인 행동 강령으로는 상식적인 대중 미디어, 특히 연애에 대한 대중 미디어 소비를 줄이는 것이 있다. 우리가 연애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생각보다 우리의 본질적인 감정 반응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미디어에서 ‘X라는 사건이 일어나면 응당 Y라는 감정을 느껴야 한다’라고 학습한 감정 반응이 많다. 예를 들어, 수많은 드라마에서 연인이 헤어지고 나서 서로를 미워하는 장면을 보고 나는 헤어진 연인이라면 응당 미워야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성인이 되고 보니 굳이 내가 당시의 내 판단력으로 선택해서 인생의 좋은 한때 보낸 사람이 별로 밉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결과가 어땠던 그 당시 나의 선택을 책임져야만 거기서 배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여자는 열렬한 구애를 하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다는 미디어 프레임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실질적으로 나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는 남자가 나를 엄청 사랑한다고 해서 만나봐야 그 남자가 사랑해 마지 않는다고 하는 대상은 나의 겉 껍데기에 그가 투영한 그의 환상이었지, 진짜 내가 아니었어서 그런 ‘사랑’은 받을수록 허무했고 내 인생이 가짜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허무함만으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런 식으로 남자의 열렬한 구애에 휘말려 별로 맘에 차지도 않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해서 결국엔 자기를 ‘사랑’한다던 남자에게 폭언과 폭력의 피해를 입는 여자들도 너무나 많다. 우리가 잘못된 연애 상식을 학습하는 미디어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영상 매체에 국한되지 않고, 각종 여초 사이트와 유튜브도 포함된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생각은 우리가 소비하는 미디어 인풋과 크게 달라지기 힘들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본질을 보는 눈을 키우려면 일단 처음엔 이런 대중적 미디어를 멀리하는 것이 좋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노력은 경험의 양과 다양성을 높이며 나만의 빅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식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는 방법은 그 위에 뭔가 다른 것을 새롭게 쓰는 방법 뿐이다. 새로운, 편견 없는 시선으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더 다양한 환경에 자신을 노출해 보면서, 막연히 내가 좋아할거라고 생각했던 것들과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을 구분해 보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막연한 환상으로 의사 남자친구가 이상형이었다면, 실제로 의사가 직업인 남자와 사귀어보면 생각보다 나랑 만나줄 시간도 없고, 만나더라도 항상 피곤에 절어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것 만큼 돈이 많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다. 이런 현실을 알아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열정이 내게도 영감을 줘서 나의 삶이 고양되는지, 아니면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없는 의사 애인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등의 진짜 나의 취향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통해서 상식을 넘어선 본질을 보는 훈련을 하는 과정이 축적되면, 비로소 통찰력이 한 단계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프록시와 본질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본질 그대로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학벌, 외모, 몸무게, 수입, 집안 환경, 인스타 팔로워 수 등 끊임없는 프록시의 잣대로 나 자신을 평가하고 우월감과 열등감을 번갈아가며 느끼며 고통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점점 나 자신을 프록시로만 규정하게 되고 나의 본질은 나 자신조차 알아주지 않고, 자존감은 계속 떨어지고 자존심만 남는다. 반대로 내가 왜 모든 외적인 조건을 떠나 본질적으로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면, 나는 고유의 존재가 된다. 고유의 존재로서의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면 타인 역시 그만의 존재로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이 명제를 진짜로 믿기 위해, 본질을 보려는 노력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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