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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Oct 17. 2023

주민증에 20년 전 얼굴이 있다

새로 찍은 주민증 사진 속에는 내가 없었다

 불현 듯, 갑자기,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밖에서 바라보면 급할 것도 없는 시시콜콜한 사소한 업무 같은 것.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눈에 띄지도 않는 별거 아닌 일이 지금 당장 하고 싶어졌다.  


 주민등록증을 바꾸고 싶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민등록증에 새겨진 내 과거의 사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지금의 나로 대체하고 싶었다. 주민등록증에 박힌 얼굴 사진은 20대 초반의 젊은 나였다.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성형수술도 하지 않았고, 몸무게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얼굴의 형태는 비교적 비슷했다. 하지만 20대의 풋풋함과 40대의 농후함은 얼굴에 묘하게 번져 그대로 나타났다.


 은행이나 공공기관에서 나의 주민증을 보고, 갸우뚱하면서 놀라는 표정을 몇 번 보았다. 내가 보기엔 별 차이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남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세월의 흐름을 직시하지 못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하며 10여년을 우겼다. ‘이거 나 맞는데요.’ 가까스로 고집을 피우면 해결되지 않을 만큼 긴박한 문제는 없었다. 


 곧장 가까운 사진관으로 달려가 주민증에 사용할 사진을 찍었다. 15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근처에 위치한 생활용품점에 가서 1,000원짜리 물건들을  몇 개 구입하면서 짧은 시간도 알차게 보낸 후, 돌아오니 하나의 얼굴이 반복된 인화사진이 출력되는 중이다. 사진으로 출력될 나의 얼굴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 기대감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여기 사진 나왔습니다.”

 “…….”


 분명 한 여자의 얼굴이 있었다. 턱이 계란형처럼 갸름하고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은 부풀려 있는. ‘이건 누구지?’ 사진 속에는 ‘내’가 없었다. 증명사진을 촬영한 30대 후반의 사진사는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 보정에 보정을 거듭했다. 몇 번 이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긴 했지만, 특별한 교감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몇 달 전부터 내가 다니던 수영장에 그 사진사가 초급반으로 들어왔고, 약간의 안면이 있어 인사를 주고받았다. 사진사는 수영을 나름 열심히 하다가, 언제부턴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진을 찍기 전 수영을 왜 그만뒀는지 물었다. 


 “사진관 끝나고 부랴부랴 수영장에 갔던 건데, 너무 힘들더라구요. 사진관은 8시에 끝나고, 수영은 8시에 시작하고. 시간이 안돼서 못 갔어요.” 수영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한가지여도 수영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그렇게 수영을 그만두었지만, 그때의 친밀감은 남았는지 사진관에 갔을 때에는 손님 이상의 친절이 사뭇 느껴졌다. 사진사는 나를 위해 ‘보정’을 때깔나게 해준 것이다. 잠시 침묵하며 사진을 바라본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 사진으로 주민증을 만들면 신원확인을 못 할 것 같은데요.” 

 그제야 사진사도 웃어 보이며 다시 인화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재차 말했다. 

 “보정은 하나도 하지 말아줘요.” 사진사는 이 말이 아쉬웠는지 피부만 손봐주겠다고 한다.  나의 얼굴 중 오른쪽으로는 50원 동전만한 크기의 흑자(검버섯)가 있고, 눈 아래 명확한 점도 있다. 이마에는 가로 물결무늬의 주름이 서너 줄 있고, 그 외의 여백에는 기미가 송송히 자리한다. 이 모든 이미지를 한 순간에 떠올리고, 나는 타협을 했다. 


 “그래요, 피부만 정리해줘요.”

 10분도 안 되어서 새로운 얼굴이 인화기계를 통해 출력되고 있었다. 비로소 ‘나’를 만나는 시간. 어떻게 보여지는지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사진을 보자마자, 내가 한 말은 


 “그렇지, 사각턱이 있어야 내 얼굴이지.” 

 비로소 익숙한 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눈은 평평하고,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았고, 얼굴형도 그대로다. 그럼에도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였던 건, 아마도 티 없이 고운 피부 탓이려나. 얼굴 피부에서 점 하나 보이지 않는 말끔함이 조금은 어색했다. 하지만 피부 표현까지 살려달라고 별난 손님처럼 굴고 싶진 않았다. 이정도면 됐다는 체념. 


 충동적이지만 그토록 열렬히 갈망한 소소한 일은, 다름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고 싶었다. 아무 보정도 하지 않은 지금의 나, 40대 중반을 넘어서며 늙어가는 한 여자의 얼굴. 그 얼굴을 찬찬히 음미하며 ‘그래 이 정도면 됐다’며 안아주고 싶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떨결에 주민증 사진으로 변환되어 한바탕 일을 벌린 것이다.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이 아니어도 될 일.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일. 그 일을 지금 당장 해치우고 싶은 다급함. 주민증 사진으로 해소되지 못한 마음을 카톡으로 옮겼다.  프로필 사진을 바꾸기로 했다. 그동안 찍어 두었던 수십장의 얼굴 사진을 살펴본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들은 저마다 각도를 달리하고, 보정을 해서 나름 예뻐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픽’한 사진은 활짝 웃어 보이는 행복을 연기한 얼굴이다. 


 불현 듯 솟구쳤던 오늘의 내 얼굴을 직시하겠다는 열망은 수면 밑으로 점차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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