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재미있게 살아. 눈 깜빡하니 벌써 이 나이야. 엊그제 남편 차도 팔았어. 나이가 드니까 운전도 어려워서. 이제 이 목욕탕도 버스 타고 다녀야 해. 점심 먹고 가려면 몇 시 버스가 있으려나.”
늙어보니 젊음이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한탄하는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 겉으로 봐서는 특별히 불편한 곳은 보이지 않고, 적당히 살집이 있고 얼굴빛이 하얀 것을 보면 농사와 같은 거친 노동의 역사는 몸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푸르른 하늘 아래 노천탕에 걸터앉아 나를 향해 진심어린 말을 건넸다.
이런 분위기는 대중목욕탕에서 특히 여탕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몸을 있는 그대로 햇볕에 널 수 있는 노천탕에서 여자들은 처음 본 낯선이에게 마치 오랜 친구인냥 쭈뼛거림도 없이 곧장 말을 건네곤 한다. 나이든 어르신들이 비교적 젊은 처자들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찐 교훈들을 꺼내놓는 것이다.
“자식들 다 필요 없어. 맘에 안 들어도 옆에 있는 신랑이 제일이여.”
“젊을 때 여기저기 다녀봐, 여행도 좋고. 나이가 들면 여행도 힘들어.”
“몹쓸 몸뚱이가 말썽이여. 걷는 것도 어렵고 무릎 수술했어. 젊었을 때 건강 잘 챙겨.”
따스한 햇살의 기운이 피부로 전해지며 온몸이 이완하려고 할 즈음, 여지없이 이런 조언들이 나에게로 향한다. 조언을 건네는 그 사람들의 눈빛에서 ‘자기고백’적 성격이 내비쳐 나로서는 “네~”라고 조용히 응수할 뿐이다.
벌거벗을 자유가 허용되는 대중목욕탕에서 홀가분함을 맘껏 느끼며 열탕과 냉탕을 오고가노라면, 뜨거움과 차가움이 온몸으로 교차되면서 약간의 흥분을 하곤 한다. 미지근한 온탕에 오래도록 몸을 담그고 싶다가도, 이내 심장이 쫄깃하게 얼어붙는 냉기운을 느끼러 냉탕에 몸을 담근다. 으스스한 냉기운이 찌릿하게 정신을 차리게 만들다가도 얼른 뜨거운 기운이 맛보고 싶어 열탕으로 스르르 미끄러진다. 열탕과 냉탕의 온도 차, 뼛속까지 전해지는 작은 쾌감. 이 맛에 중독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찾곤 하는 대중목욕탕.
‘재미있게 살아’라고 인생의 조언을 전했던 할머니는 어느새 자리를 비웠다. 목욕을 끝내고, 함께 마실 나온 남편과 점심을 드실테지. 할머니는 어떤 재미있는 삶을 꿈꾸었기에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빌려 자기고백을 했을까.
목욕을 마치고 간단히 옷을 차려입고 나가니,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옆에는 걸음걸이가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한 남성이 있었다. 아마도 남편이리라. 목욕탕이 위치한 건물 1층에는 8,000원에 맛깔스럽게 나오는 한식뷔페식당이 목욕을 끝내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소박한 식사를 하기 위해 곧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이다. 식당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등 뒤에서 나는 속엣말을 한다.
‘할머니,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재미있게 사세요. 지금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