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같은 문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체념했던 어제의 문제가 하룻밤이 지나면 새 아침의 환한 빛에 생기를 얻어 살아나곤 한다. 어제는 분명 헬스장에 가지 못할 이유들을 나열하면서 잠들었건만, 숙면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조금 욱신거리지만 그 통증마저 위로가 된다.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지. 아프고 힘든 게 당연해. 그러니 오늘도 헬스장에 가서 살살, 또 해보자.
기껏 이튿날인데 첫날에 헬스장 문 앞에 섰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간다. 전신거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는 발걸음에 낯섦보다는 설렘이 살짝 비집고 들어온다. 어제 헬스장에서 본 얼굴들을 만나자 반가운 마음까지 든다. 같은 고생을 사서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동지애를 느끼는 걸까. 혹시라도 너무 눈에 띌까 가벼운 눈인사만 건넨다. 벽면에 붙여진 스트레칭 그림들을 보며 몸을 깨운다. ‘나 이제 운동할 거야. 마음의 준비하는 거야.’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앞두고 최면을 걸 듯, 혼자 마음을 달래 본다.
오늘은 러닝머신이다. 헬스장에 들어선 대부분의 여성들이 맘 놓고 안착하는 러닝머신. 지루함은 텔레비전 시청으로 달래고, 오랜 시간 운동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헬스장 기본옵션. 오전에 운동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거쳐가는 1차적인 코스. 나도 다를 것 없다. 저 여성들처럼 자연스레 러닝머신 위로 위치한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다가, 뛸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왕년에 달리기 선수였다. ‘선수’라는 어감에 다소 오해할 수 있으니 자세히 풀어서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1년에 한 번씩 가을에 열리는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는 꽃이었다. 운동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생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겼다. 특히 사람들이 운동장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앉아 있으면 그 동그란 선 바깥으로 계주 선수들이 달렸다. 힘찬 응원소리, 백팀 이겨라, 청팀 이겨라, 홍시야 빨리 달려. 학교 전체를 들썩이게 만드는 함성 소리에 동네 전체가 흥분의 분위기가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바통을 넘겨받으며 젖 먹던 힘까지 달려내는 계주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치려 한다.
운동회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했던 화려했던 달리기 계주에 나는 반대표 선수로 나가곤 했다. 그 시절 한 반에 40여 명이 학생이 있고, 그중 여자는 20여 명이라 한다면 그 20여 명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든다는 것이다. 반을 대표해서 달리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며 ‘선수’라는 말을 맘껏 사용해도 거리낄 것 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매년 운동회만 열리면 반 대표 달리기 선수로 계주에 나갔다. 얼마나 잘 달리고, 성적은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확실한 것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힘껏 달려 도착 지점에 도달해 헐떡거리던 심장의 박동소리가 좋았다. 이를 악 다물고, 젖 먹던 힘까지 힘을 쏟아냈던 짧은 단상이 오래도록 뇌리에 박혀 있다. 달리기 선수였다는, 학생 때의 명성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달리기를 좋아했던 10대의 소녀가 내 가슴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줄 알았다. 언제 달려도 그때처럼 가볍게 사뿐하게 달려질 줄 알았다.
초등학교 운동회를 마지막으로 달릴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중학교에 가서부터 학업에 매진한다는 이유로, 거칠게 달리면 출렁거리는 가슴이 창피해 전력을 다해 달려보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달리기'는 추억 속의 단편이 되어 서랍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러닝머신에 서자,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달리기를 좋아했던 왕년의 내가 떠올랐다. 마치 그때의 내가 된 것처럼 사뭇 긴장한 채로 달릴 채비를 했다. 가볍게 걷기부터. 러닝머신의 단계별 속도를 가리키는 숫자는 5, 숫자가 커질수록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평소에도 걷기에는 자신 있었다. 6을 누른다. 걷기에는 빠르고, 뛰기에는 좀 어정쩡하다. 7이 적힌 숫자를 과감하게 누르고 달리기 실력을 뽐낼 작정이다. 헬스장의 사람들 중 아무도 날 보고 있지 않았지만, 온몸의 신경은 운동장을 에워싸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받으며 뛰고 있는 것처럼 의식되었다. 모든 사람이 날 보는 것 같았다. 긴장이 되었지만 여지없이 다리는 움직여야 했다. 달려라, 달려. 러닝머신을 밀어내는 둔탁한 착지 소리.
러닝머신이 돌아가며 다리도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달리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달리는 폼에 더 가까웠다. 나는 달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너무 크게 느껴져 잠시 놀랐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소심한 의심이 들며 시계를 보았다. 달린 지 1분도 안 되었다. 2분, 3분… 5분도 안 돼서 빨간색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달리기는 멈췄다. 왕년의 달리기 좀 했던 소녀는 5분 만에 소진되었다.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다행이다. 날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날 보고 있던 건, 똑바로 목도했던 건 바로 나였으니까. 얼른 숫자 ‘5’로 돌아온다. 심장의 박동은 잠잠하게 잦아들었다.
고동치는 심장의 박동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생생하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은 맛볼 수 없었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응원으로 한계를 훌쩍 뛰어버리는 희열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어떤 미래도 기약하지 않았다. 안주할 수밖에 없는 처연한 몸놀림. 지금의 나는 달리기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