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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an 10. 2023

운명의 나라, 운명의 남자 3

다시 제자리로

  말레이시아에서 남편감은 찾지 못했지만 대신 친구를 찾았다.

외로운 국제 학생들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따뜻한 말레이시아 집밥을 대접해주고 또 몇 년 뒤 내 결혼식까지 와준 신시아와 토마스 부부, 왕눈이 약사 슈밍, 동갑내기인 댄스 스포츠 강사 아이비. 이 인연들 덕분에 말레이시아에서의 내 삶은 알록달록 총천연색이었다.

  말레이시아 생활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교회에서 만난 신시아, 토마스 부부였다. 인테리어 감각이 남달랐던 금손 신시아 아줌마는 얼굴도 눈도 코도 다 동글동글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아요~”하며 말을 시작하면 어찌나 빠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말이 끝나면 “니키따, 오깨?”하고 해맑게 웃곤 했다. 

  과묵한 토마스 아저씨는 가발 모델로 지역의 유명 인사였는데 외향적인 신시아 아줌마와 대화를 했지 내향적인 아저씨와는 말을 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눈물 많은 신시아 아줌마가 학생들과의 관계나 학생들의 개인적인 보살핌을 계획했다면, 꼼꼼한 토마스 아저씨는 교회 행사나 재정적인 부분과 같은 큰일부터 학생들의 픽업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까지 실천하는 환상의 콤비이자 국제 학생들의 대부, 대모였다. 

  작은 키에 윤기 나는 까만 단발, 뽀얀 얼굴과 큰 눈의 약사인 슈밍도 교회에서 만났다. 어느 날 신시아 토마스 부부가 바빠서 내 픽업을 그녀에게 맡겼는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거의 매일 붙어 다녔다. 

  수요일 오후면 몇몇 한국 학생들과 함께 교회에서 하는 어린이 백혈병 환자들에게 자원봉사를 나갔는데 거기서 레지던트이자 같은 교회 신자였던 훈남 Dr. Chen을 만났다. 슈밍은 닥터 챈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내가 슈밍의 마음을 눈치채고 둘 사이에서 향단이 역할을 해내면서 둘은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몸을 구겨야만 탈 수 있었던 슈밍의 프로톤(말레이 자동차 브랜드)을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 창문을 연 채 Selena의 I could fall in love를 둘이 목이 터져라 부르던 새벽이 눈에 선하다. 그즈음 아이비를 만났다. 

  아이비는 슈밍의 댄스 스포츠 선생님이었다. 슈밍과 붙어 다니다 슈밍이 댄스 강습을 받으러 간다기에 거기까지 따라갔다. 수업이 끝나고 슈밍이 ‘겨울 연가’에 빠져 차 안엔 한국 가요를 녹음한 불법 CD가 넘쳐나던 아이비에게 나를 소개했다. 한류의 본고장에서 날아온 나를 아이비는 무척 반가워했고 수업 후 우리 셋은 작은 식당에서 수다를 이어갔다. 그날 이후 슈밍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아이비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전직 말레이시아 댄스 스포츠 국가 대표였던 아이비는 말레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방계 이목구비가 아닌 한국 사람에 가까운 북방계 미인이었다. 동남아의 열대 기후 탓인지 아이비는 주로 헐벗고 다녔다. (아이비는 내게 제발 조금만 입으라고 다그쳤다) 덕분에 큰 키와 날씬하고 탄탄한 몸매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라틴 댄스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그녀는 급한 성격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철저히 피했다. 

  동갑이었던 아이비와 나는 주말이면 만나 급속도로 친해졌다. 물론 그 매개는 영어였지만 신시아나 슈밍과는 그 깊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봉사의 대상으로 나를 만났다면 아이비는 친구로서 나를 봤기 때문이다. 신시아와 슈밍은 나를 만나면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고 살폈지만, 아이비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을 물었다. 

  아이비는 외로운 한국인 친구를 집으로 자주 초대해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주곤 했다. 아이비 집에 가면 집밥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곤 했는데 식사 후엔 나는 부모님과 언니, 조카들 앞에서 한국 가요, 동요와 춤을 겸비한 리사이틀로 보답했다. 아이비 가족과 일요일 아침이면 딤섬 식당도 가고 아이비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 가서 식당 봉사도 하며 말레이시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귀국이 다가오자 아이비는 여행을 제안했다. 여행지는 말라카로 정하고 아이비 차로 여행을 떠났다. 호텔에 차를 세우고 말라카의 상징인 네덜란드 광장으로 갔다.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한 빨간 크라이스트 처치 앞에서 35도의 찜통더위는 나오지 않는 행복한 미소의 사진도 찍고 쳉훈텡 불교 사원에 가서는 아이비를 따라 향을 피워 열심히 흔들며 기도도 올렸다. 

  귀국 전날 아이비는 내가 평소 귀여워하던 조카 남매를 차에 태워 기숙사로 왔다. 1층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아이비에게 배웠던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을 카 오디오를 크게 틀고 있었다. 등려군의 구슬픈 노래를 배경으로 아이비는 다음날 공항 갈 때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울었다. 나는 괜찮다며 조카들과 아이비를 안아주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며 약속했고 나는 그 약속은 훗날 남편과 함께, 아이와 함께 지켰다.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말레이시아를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이번에도 신시아와 토마스 부부가 왕복 세 시간 걸리는 공항까지 당연한 일처럼 함께해 주었다. 공항에서 내게 신시아 아줌마가 작은 책 하나를 건넸다. 그것은 셀 모임에서 내가 김칫국물을 마셨던 중국 총각이 준 것이었는데 영어로 된 어린이용 성경책이었다. 비록 웃음이 헤픈 남자였지만 어린이용 성경책이면 모를까 두꺼운 성경책은 부담스럽다던 나의 말을 기억해서 어린이용 영어 성경책을 보낸 속 깊은 남자였다. 공항에서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많이 울어 아줌마 아저씨를 당황케 했고 눈이 부어 뜨기도 힘들었다는 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7개월간의 말레이시아에서의 삶을 두고 한국으로 왔다.

  뼈 빠지게 일하는 삶에 지쳐 떠났던 나를 말레이시아는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그 안에서 얽히고설킨 인연들은 도망가지 않고 원래 나의 자리에 오게 해 주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나는 달라져 있었으니까. 

운명의 나라, 말레이시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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