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엄마 왔어!”
드르륵, 문을 열며 퇴근인사를 했다. 후다닥 소리와 함께 큰아이가 식탁에 앉아 독해집을 펼친다. 엄마가 오자 마자 공부하는 척 하려는 것 같았다. 들어오자마자 공부하는 척을 하다니, 혼을 내줄까, 아니야. 그런다고 행동이 바뀌나.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아이의 얼굴을 살폈는데, 낯빛이 어둡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있는거 같은데?”
“아니라고!!”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아이를 조용히 방으로 불렀다.
“무슨 일인지 엄마한테 얘기 해줄 수 있어?”
“아니, 없었어.”
“학교에서 무슨일 있었니?”
“아니.”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퍼붓다가,고구마 백 개 먹은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질문공세를 멈추고, 기다림을 선택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때도 있으니까. 한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건냈다.
“넌 아니라고 하는데, 너의 표정이, 얼굴 빛이, 무슨 일이 있다고 얘기 해주는거 같아. 말하고 나면 한결 편안해 질거야. 엄마한테는 다 얘기해도 돼. 얘기해줄 수 있을까?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얘기해줘. 엄마가 기다릴께”
그제서야 씰룩거리는 입술과 함께 눈물을 왈칵 쏟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플라잉 요가를 갔는데, 나는 자세가 안되는데 쟤(동생)는 되잖아. 그래서 슬펐고, 속상해서 아빠한테 얘기 했는데, 글쎄 아빠가 살쪄서 그런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하잖아. 내가 얼마나 요즘 관리해서 잘 유지하고 있는데, 안그래도 자세가 안되서 속상한데, 살쪄서 그런거라고. 어떻게 아빠는 그럴 수가 있어!!”
얘기를 하면서 감정이 복받쳤는지 더 큰소리로 얘기하며 폭풍같은 눈물을 쏟아낸다.
“체중관리로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인데, 살쪄서 그렇다니 어떻게 나한테 그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다니,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딸 속상했겠다. 자세도 안되서 속상한데 살쪄서 그렇다니!! 너네 아빠 대문자 T 티낸대니.”
엄마의 맞장구가 속시원했는지, 아이가 피식 웃는다.
“맞다 아빤 T 였지, 그래도 그렇지 아빠가 딸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잠시 나가 줄 수 있냐는 딸의 요청에 자리를 비워줬다. 방에서 큰 소리로 목놓아 우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같은 공간에서 말없이 보내는 시간은 하루가 일년 같다. 한참을 울던 아이는 감정이 추슬러졌는지, 빼꼼 문을 열고 나온다. 배가 고픈지 저녁 식탁에 앉아 조용히 먹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함께 씻으러 들어간 욕실에서 오늘 처음 들어보는 경쾌한 목소리를 꺼냈다.
“엄마~~ 내 기분 풀어줘서 고마워! 들어주고 내 편이 되어줘서 고마워! 엄마가 알아봐주지 않았으면, 나는 저녁내내 꽁해있을거고, 공부도 못하고, 내일도 망쳤을 것 같아. 엄마한테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너무나 후련하고, 가벼워! 나도 왜 그런지 몰랐는데, 내 안 좋은 기분 알아봐주고 들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엄마!!”
다 컸네,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자란 걸까.
이렇게 금새 감정을 해소하고 엄마 마음을 알아차려준 딸이 기특하고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나에게 불편한 느낌이 있을 때, 그 감정을 알아봐주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방법을 아이는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았다. 더 나아가 불편한 감정을 끌어 안고 있는것보다 내보내주는 것이 가볍다는 것도 알게 된 것 같아 아이를 보는 내 눈에 힘이 빠졌다. 편안해졌다. 이런 일은 언제고 또 반복되겠지만 다음번엔 분명 좀 더 편안하게 감정과 마주하겠지.
얼핏 사소해 보이는 소소한 감정을 그때 그때 알아봐주지 않으면 눈덩이처럼 커진다. 그래서 본인이 왜 그러는지 모른채 과도하게 긴장하게 되거나, 두려움, 불안등을 느끼며 주저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일상속에서 기분을 알아차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자. 알아봐주는 것만으로도 금새 편안해질 수 있다.
오늘 아이가 느낀 감정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부끄러움, 서운함, 억울함, 인정하기 어려움, 상처, 배신감, 각오, 후회...
어떤 이름을 골라다 붙이든 그건 주인의 마음이다. 내 감정의 주인이 되어 모호하기 짝이 없던 감정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 나를 사랑하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을 디뎌본다.
“당신의 감정 상태는 진실로 당신이 생각할 것들과 당신이 집중하는 것들과 많은 관련이 있다.”
-다니엘 카너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