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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l 14. 2023

언어에 대한 치열한 사유

 서평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융합과 횡단의 글쓰기>(교양인)

융합인재교육, 융합기술, 미래융합대학 등등... 특히 산업의 혁신과 과학 관련 분야에서 많이 만나게 되는 단어인 ‘융합’은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가진다. 누구나 거의 이의 없이 사용하는 이 ‘융합’의 의미에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태클을 걸었다. 융합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 에세이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교양인, 2022)는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중 마지막 다섯 번째 책으로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를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언어들을 낯설게 만든다.


저자 정희진은 대학과 시민단체등에서 여성학과 평화학을 강의했고 다양한 여성조직에서 자문위원,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학제적 관점에서 공부와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책으로 펴내고 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페미니즘의 도전>(2005), <정희진처럼 읽기>(2014), <아주 친밀한 폭력>(2016) 등이 있다. 국내 여성학 연구자의 책으로는 드물게 20년 가까이 판을 계속해 출간되고 있는 <페미니즘의 도전>은 여성주의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희진이 말하는 ‘융합’은 기존의 관념과 사뭇 다르다. 그는 융합을 ‘우리가 아는 지식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공부의 즐거움과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실천(practice)이자 내 생각을 분명히 알고 더 필요한 앎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경계 넘기(rooting and shifting)’(p.16)라고 말하며 ‘더하기’가 아닌 ‘전환’과 ‘의미의 도약’으로 보기를 권한다. 비슷한 의미에서의 ‘통섭’도 ‘지식의 통합’이란 측면이 아니라 변화하고 횡단하며 새로운 사고로 나아가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언어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곧 기존 관념에 대한 재해석으로 이어지고 이는 친숙하게 여겼던 나의 언어가 사실은 ‘주류’의 그것이었다는 날카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지도록 독자를 인도한다.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p.146)


언어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사유는 어떤 독자에게는 과격하게 느껴질수도 있을 정도로 전복적이다. 모든 사유의 키워드이자 융합의 핵심으로 ‘차이’를 말하는 저자는 ‘소통의 불가능성’을 역설(力說)한다. 소통을 위해 차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알려면 새로 공부해야 한다.”(p.202) 그렇다면 공부는 과연 어떤 공부를 말하는 것일까? 독자는 더 이상 기존의 지식을 답습하며 단순하게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닌, 지금의 나를 다른 곳으로 횡단시키며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는 모든 행위의 의미로서의 ‘공부’를 생각하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사유는 고정 관념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독자는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들을 재해석, 재배치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때로 맥락에 따라 가변적으로 사용될 수 밖에 없는 언어의 유동성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융합에 있어 ‘연대’를 최악의 이해라고 말하며 연대에 동원되는 약자들이 ‘대의’에 종속됨을 비판한다. (p.148) 하지만 또 한편 세대 갈등 현상의 실상을 이야기 할 때는 청년과 중년의 갈등이 아니라 계급 문제라고 하며 ‘나이와 관계없이 가난한 사람들끼리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p.176) 어느 입장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희진의 글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이러한 유동성이 불편함으로 작용하게 될 수도 있겠다.


만약 ‘글 잘 쓰는 법’을 기대하고 이 책을 선택했다면 다시 내려놓을 것을 권한다. ‘글쓰기’를 표방한 이 책에서 어떤 독자는 ‘How to~’류의 안내서를 기대할지도 모르겠지만, 시리즈의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정희진의 글쓰기’ 인 것이다. 즉, 이 책의 내용은 정희진이라는 작가의 ‘글 쓰는 이유’에 가깝다. ‘작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정희진의 분투를 보며 독자는 내가 현재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가치관과 당파성을 획득한 후 경계를 넘어서는 추동력을 얻게 된다. 정희진이 권하는 여정(journey)에 함께 해 변화와 횡단, 매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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