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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Oct 03. 2023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빛나는 문학에 대한 사랑

서평 <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는 독일어다. 유럽 인구의 20%가 모국어로 독일어를 사용하며 3분의 1 이상이 독일어 문화권이다. 독일 문학이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져도 괴테와 실러,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 등의 작가는 친숙하다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1920~2013)는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지만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 비평가이며 ‘독일 문학계의 제왕’, ‘문학의 교황’등의 수식어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 <나의 인생-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 문학동네, 2014)은 홀로코스트에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던 한 개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담담하면서도 유려하게 펼친다.


책은 5부로 나뉘어 그가 태어난 1920년부터 1999년까지의 시간적 흐름을 따른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저자는 유년시절 베를린으로 이주하며 독일 문학과 음악, 연극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그는 아비투어(고등학교 졸업시험이자 대입자격시험)를 통과하고 대학에 진학해 독문학을 배울 계획을 세우지만,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인 배척으로 인해 대학입학이 좌절된다. 1938년 폴란드로 추방된 후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독일어와 폴란드어를 번역하며 폴란드 문학에도 눈뜨게 된다. 제3제국(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이 절정에 달하며 1943년 가스실로 강제 이송될 위기에 처하지만, 부인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탈출해 바르샤바 변두리의 식자공 부부의 집에서 숨어 지내는 등 많은 고초를 겪는다. 


종전 후 폴란드 군에 자원입대하고 공산당에 가입하는 등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일하지만 점점 강해지는 스탈린주의는 저자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결국 서독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비평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파란만장한 저자의 인생 중 만났던 문학작품과 음악, 연극, 그리고 많은 작가들의 이야기는 책의 곳곳에 포진해 저자의 문학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귄터 그라스를 시작으로 에리히 케스트너, 하인리히 뵐,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작가들과의 에피소드는 문학작품이라는 무대 뒤의 풍경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독자는 독일 현대문학계의 지형을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내쫓은 나라를 떠날 때 가지고 나온 것은 바로 언어였다. 그리고 문학이었다. 그건 독일어였고, 독일 문학이었다.”(p.143) 유대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풍파도 저자의 독일 문학에 대한 애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제3제국에 의해 부모와 형을 홀로코스트로 잃었지만 서독으로 망명해야만 했던 아이러니한 시대상황은 분명 한 인간을 분열적인 상태로 몰고 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반유대주의로 인해 공동작업임에도 불구하고 편집부에서 일할 기회를 받지 못하는가 하면, 나치 독일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으로 알려진 ‘역사가 논쟁’에서는 은인이기도 한 언론인 요아힘 페스트의 극우적 태도에 상처를 받는다. 오직 문학만이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생명줄 이었을 것이다. 


문학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확고하다. “비평 없는 문학은 존재하지만 문학 없는 비평은 존재하지 않는다...(중략) 우리는 문학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작가들에게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p.308) 저자는 작가들에 대한 감사와 존중을 드러내면서 솔직하고 명료한 평론으로 독자의 지지를 받았다. 라이히라니츠키는 ‘평론가와 작가의 사이는 그 평론가가 그 작가의 최신작에 대해 뭐라고 썼느냐에 달려 있다’는 세간의 이야기에 동의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작품이 좋지 않으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론이 견지해야 할 당연한 태도이면서도 문학계의 관계 안에서 결코 쉽지 않은 자세다.


“훌륭한 평론가란 언제나 명료함을 위해 글을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중략) 내 평론을 읽으면 내가 어느 신간 문학작품을 옹호하는지 아닌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면서 많은 독자들이 고마워했다.”(p.392) 그가 지향했던 비평처럼 자서전 또한 알기 쉽고 명료해 가독성이 높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 없이 읽히는 것은 그의 필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례없이’ 많은 고통을 통과해야만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밀도 높게 펼쳐지고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독자는 그가 인용한 호프만슈탈의 마지막 인용구를 읽으며 한 인간이 이루어낸 사랑의 지고함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는 물론이고,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믿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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