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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Dec 05. 2023

시인이 책을 읽는 법

<읽거나 말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봄날의 책, 2018)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는 “모차르트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45년 『폴란드일보』에 시 「단어를 찾아서」로 등단하고 1952년 첫 시집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출간한 그는 <예티를 향한 부름>(1957), <끝과 시작>(1993) 등 12권의 시집과 유고시집 <충분하다>(2012)를 남겼다. 서평집 <읽거나 말거나>는 1967년부터 2002년까지 30여 년간 일간지와 문예지에 연재한 독서칼럼을 묶은 책으로, 선별된 137편의 산문이 연대순으로 실렸다.


“본질적으로 나는 독자로, 아마추어로, 그리고 뭔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물길 원한다”(p.6) 쉼보르스카는 평론가들이 선호하는, 소위 ‘논평하기 좋은 책’이 아니라 인문학술서, 시선집, 어휘·용어집, 실용서, 심지어는 ‘벽걸이 일력’에 대한 칼럼을 썼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산문집은 책을 권하기 위한 서평이 아니다. 시인이 읽고 느낀 바를 진솔하게 옮긴 결과물이다. 


여기에 실린 절대다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인데, 쉼보르스카는 이 책들을 매개로 다양한 상상을 펼친다. 미에치스와프 예지 퀸스틀러의 <한자>를 읽고 중국의 타자기를 ‘80여명의 숙달된 속기사를 태우고 왔다 갔다 하는 기관차 정도 크기의 거대한 기계’로 상상하기도 하고(p.117), 동아시아의 요리책을 집필하는 작가와 편집자와의 대화를 상상하기도 한다. (“작가님, 이상한 일이죠? 이렇게 자꾸만 고민을 거듭하다보니, 동아시아의 음식이 더 이상 이국적으로 느껴지질 않네요...”<동아시아의 음식>(p.217)) 네덜란드 화훼산업과 현황을 축약 없이 장황하게 수록한 책 <화훼장식>에서 시인은 “우리 폴란드에서는 종이 수급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은 달콤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며 혹평을 하기도 한다.(p.228)


그럼에도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유머와 따뜻함이다.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시인의 유머러스한 감상에서 독자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대목에서는 인류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엿보인다. <마녀들-마녀 재판의 역사>에서는 네덜란드의 아우데바터르의 저울에 대한 에피소드(몸이 가벼운 사람을 마녀로 식별하는)로 정의로우면서도 영리하게 ‘생명수호의 희극’에 참여한 시민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파라오로 군림했던 이집트의 여왕 하트셉수스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와 달리, 누군가-왕위를 위협할만한 양아들-를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인은 높이 평가한다. 불안돈목(佛眼豚目),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던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글에서 그의 다정한 마음을 유추하게 된다.  


‘쉼보르스카 서평집’이라는 부제를 단 <읽거나 말거나>는 사실 서평집이라고 한정짓기엔 자유로운 성격을 가진다. ‘비필독도서’라는 원래의 칼럼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책에 대한 평가보다는 책을 매개로 한 산문집에 가깝다. 책의 추천을 위한 서평집을 기대한 독자라면 당황스러울수도 있으리라.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를 여배우로 표기한 것은 번역의 실수일까? 자잘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 책의 감점요소가 되지는 못한다.


<길가메시>에 대해 시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라는 역사적 의의 보다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비통한 운명에 대한 탄식이라는 점에 주목하며, “객관적 사실들의 의기양양한 행군 속에서 짓밟히고 분실된 것들을 주워 담는”것이 바로 시인이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p.264)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대열에 뒤쳐져 걸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변명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시인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쉼보르스카의 시를 접하기 전 이 책을 읽는다면 그의 작품세계가 한 층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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