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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오리 Jul 05. 2024

격변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작가의 흔적

서평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딩링 (창비, 2012)

딩링(1904~86)은 사회주의적 문학작품을 창작하면서 여성주의 시각을 견지했던 중국의 소설가다. 20대 초반 대담하고 예민한 젊은 여성의 내면을 묘사한 소설 <소피의 일기>(1927)로 중국의 독자와 문단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또한 소설 <태양은 쌍간강을 비추고>(1948)를 집필해 1952년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스탈린 문학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조명을 받기에 이른다. 청(淸)왕조(1616~1912)의 몰락과 국공합작(1924~1927, 1937~1945), 중화인민공화국(1949~)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던 작가는 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해 적극적으로 혁명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공산당에 의해 우파지식인으로 비판 받는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다.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1937년에서 1978년 사이에 쓰인 4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린 딩링의 소설집이다.  


표제작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1941)는 당원인 화자가 요양차 간 ‘안개마을’에서 전쟁 중 일본군 위안부로 일했던 ‘전전’에 대해 알게 되는 이야기다. 마을사람들은 그녀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는가 하면 혐오와 경멸을 드러내거나 호기심을 숨기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전전은 특유의 활기와 호기심으로 인해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기 원한다. ‘병원에서’(1941)는 당의 명령에 따라 시골에 내려간 산부인과 여의사가 불합리한 상황을 겪게 되며 혁명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는 내용이다. ‘루핑’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맡은 일을 다 하려 노력하지만 열악한 환경은 그녀를 지치게 하고 당성에 대한 비판마저 듣게 만든다.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1937)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이 중지되고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쓰인 단편이다. 낙오된 홍군 소년병은 국민당 군사를 피해 숨어 다니지만 결국은 잡혀 총살될 위험에 처한다. ‘두완샹’(1978)은 20여 년간 변방에서 연금생활을 견딘 딩링이 복권되면서 발표한 중편이다. 시골 소녀 ‘두완샹’은 계모의 뜻에 따라 이웃마을 리씨 집안으로 시집을 간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녀는 남편을 따라 변방의 ‘베이다황’으로 가게 되고 결국엔 당의 모범노동자로 우뚝 선다. 


작가는 전쟁 속에서 희생양이 된 여성과 그에 대한 공동체의 다양한 태도를 드러내며 동시대를 살았던 독자들에게 문제적 현실에 대한 자각을 촉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잡화점 주인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나 시퍼런 무쇠 얼굴을 하고 차갑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를 혐오하고 경멸했으며 나까지도 자신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취급하였다.(중략) 자신은 깨끗하고 강간 같은 것은 당한 적이 없다며 뻐기고 다녔다.”(p.30) 전전과 결혼까지 생각했던 샤다바오의 고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부채감으로도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딩링의 여주인공들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다. 전전은 집을 떠나 ‘앞날을 위해 분투’하기로 하고, 그런 그녀에게서 화자는 ‘환한 미래’를 보는 듯 느낀다. 특유의 낙천성과 긍정성은 ‘병원에서’의 주인공 루핑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자신을 적대시하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주인공은 자신감을 잃지 않으며 노력과 성실로 난관을 헤쳐나간다. 하지만 난로 없이 목탄을 때느라 수술 중 가스에 중독되면서 열악한 현실에 의욕을 잃고, 급기야는 당성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다. “그녀는 날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쓰러뜨릴까 고심했고 진리는 영원히 자기편이라고 확신했다.”(p.75) 딩링은 정치적 공격을 받는 지식인 여성의 내면 변화를 정확하고 예리하게 표현한다.


낭만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작가의 시선은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의 고향을 차지하고 우리의 부모와 처자식을 죽였는데, 우리가 복수를 하지 않고 도리어 여기에서 중국인을 죽이다니. 이 어린 홍군을 봐라.(중랴) 그를 죽이려거든 나를 먼저 죽여라...”(p.98) 국민당 중대장의 대사를 통해 작가는 결국 같은 민족으로서 하나되는 중국인이라는 결론을 이끈다. 복권 이후 발표된 <두완샹>의 주인공 두완샹은 모범 노동자로서의 정치적 완벽함을 구현한다. 오랜 시간 작가로서 작품을 만들고 발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던 딩링은 인민과 당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을 이 작품에 담아야 했다. “당이여! 영명하고 위대한 당이여! 네가 세상에 주는 것은 빛! 희망! 따스함! 행복이다! 우리는 영원히 너와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싸우리라, 우리는 너의 것이니!”(p.145) 사회주의하 지식인 여성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딩링이지만, 오랜 정치적 압력은 작가로서의 시선까지도 변질시킨 듯 보인다. 시대를 이기지 못한 작가의 변화는 독자로 하여금 씁쓸함까지도 느끼게 하며 소설의 정치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중국 사회주의 문학 과 체제안에서 변화하는 작가의 족적을 따라가보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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