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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사장의 서고 Jun 20. 2019

'노팬티 샤브샤브'를 아시나요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를 읽고

‘노팬티 샤브샤브’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노팬티라는 단어와 샤브샤브라는 단어 사이에 워낙 연관성이 없다보니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으실 수 있지만, 저 용어는 과거 일본에 존재했던 변종 성매매업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해당 업소의 영업 방식은 이랬습니다. 손님이 샤브샤브를 주문하면, 일반적인 샤브샤브 가게와 같이 국물과 얇게 썬 고기가 나옵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서빙을 하는 여종업원들이 속옷을 입지 않은 노팬티 상태로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는 점입니다. 술을 시키면 테이블 위에 매달아둔 술병을 가지러 종업원이 테이블 위로 올라서고, 이상하리만큼 반사가 잘 되는 재질로 된 테이블에 앉은 남성들은 변태적 욕구를 충족하는 식이었죠.


노팬티 샤브샤브 업소를 주제로 한 일본의 성인 영상물 표지


일본 특유의 뒤틀린 성 문화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술자리 가십거리 정도의 소식이겠지만, 해당 용어가 등장한 계기는 그리 가볍지가 않았습니다. 해당 업체가 일본 국민들에게 소개된 것은 1998년. 당시 은행들의 대장성(한국의 기획재정부 격) 관료에 대한 전방위적인 접대 사건이 폭로되며, 이들이 방문했던 ‘노팬티 샤브샤브’집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입니다.



자극적인 소재에 기반한 기사가 쏟아지자 해당 관료들에 대한 수사 여론이 끓어올랐고, 정관계 비리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는 도쿄지검 특수부는 여론의 힘을 빌려 강력하게 수사를 밀어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사건에 연루된 고위 공무원 7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초거대 경제부처 대장성이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 저자 이시즈카 겐지는 이런 방식의 여론몰이 수사를 ‘극장형 수사’라고 부릅니다.



수사는 비공개가 원칙



A라는 사람이 B라는 특정 범죄의 혐의가 있다는 정보를 검찰에서 포착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A는 B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기는커녕, 검찰에서 조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기소를 한 상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A가 B라는 범죄로 인해 조사를 받는 중이라는 사실이 외부에 누설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가 A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죠.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로 접근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A라는 사람이 비난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은 범죄, 예를 들어 아동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검찰에서 포착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정확하게 수사를 진행해봐야 알겠지만, 이 시점에서 A씨가 아동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입증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실이 누설되면, A씨는 그 자체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판 저하 정도라면 다행이지만 심한 경우엔 직장을 잃겠죠.



그런데 만약 A씨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력 정치인이고, 그가 저지른 범죄가 다른 정치인이나 고위공무원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불법 정치자금 모금이라면 어떨까요? 강력한 외압을 받아 수사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있고, 수사가 진행되더라도 핵심인 A씨에게 닿지 못한 상태로 그의 부하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 될 개연성이 큽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검찰은 ‘극장형 수사’라는 것을 개발했습니다. 수사 단서를 언론에 흘려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을 조성해 외압을 차단하고, 수사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이죠. 수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타격을 주게 되지만, 그로 인해서 달성될 공익이 더 크다는 판단 하에 이런 방식을 도입한 것입니다.



양날의 검 극장형 수사’    



저자에 따르면 극장형 수사는 나름의 소득을 냈습니다. 앞서 언급한 ‘노팬티 샤브샤브’ 사건만 해도, 정부부처 중 재정을 틀어쥐고 있어 가장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장성 고위관료에게 칼을 댔다는 점에서 검찰의 위신이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이에 더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기업에 의한 고위공무원 접대도 대폭 줄어들게 됐습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극장형 수사’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검찰이 언론 플레이를 시작한 사건이 실제로 법정에서 유죄를 이끌어 낼 정도로 범죄 혐의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서 불법 정치자금 수사를 받는 유력 정치인의 예시를 다시 가져와 보겠습니다. 만약 해당 정치인이 정말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면, 외압을 차단하고 철저히 수사를 마쳐 최종적으로 유죄판결을 받는 것은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컷 언론에 흘린 사건이 실제로 범죄가 아닌 경우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앞서 살펴봤듯, 언론에 정보를 흘려 여론이 과열되면 수사 대상이 외압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은 굉장히 큰 장점입니다. 그렇지만 수사를 하는 검찰 입장에서도, 여론의 시선 때문에 퇴로가 막힌다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국민들은 엄청나게 큰 사건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쏟고 있는데, 정작 수사를 진행하다 보니 별 것 아닌 사건이거나 혐의를 입증하기가 어려운 사건이었다면 검찰은 ‘무리한 수사’라는 비난을 뒤집어쓰게 되죠.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



책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는 오랜 법조기자 경력을 자랑하는 저자 이시즈카 겐지가 일본 검찰이 자행하는 ‘극장형 수사’의 폐단을 소상히 파헤친 일종의 르포르타주입니다. 책은 과거 ‘노팬티 샤브샤브’ 접대사건은 물론이고,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명 ‘픽서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드러나는 검찰의 낯 뜨거운 실책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극장형 수사에 치중하다가 수사의 본질인 철저한 조사를 도외시하고, 결국은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죠.




예컨대 ‘픽서(fixer, 배후조종자)’ 사건의 경우는 정말 황당한 경우입니다. 2007년 즈음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 방위성(한국의 방위사업청 격)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던 중 일본과 미국 정계의 폭넓은 인간관계에 기반 해 민간부문의 군사교류 사업을 추진하던 ‘아키야마 나오키’에 대한 첩보를 하나 입수합니다. 그는 재단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재단의 자금 흐름이 수상했던 것입니다. 미국에 유령회사를 세워 미국 군수업체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일본의 방위산업계에서도 기부를 받아 매년 엄청난 규모의 심포지엄을 여는 사람이 있던 것입니다. 



당시 특수부는 이 사람이 일본 정치계에 군수산업체의 돈을 로비하는 흑막이라는 ‘시나리오’를 세우고, 그에 대한 정보를 언론에 흘리며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검찰의 최종 목표는 그와 깊은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유력 정치인. 군수산업체와 정치계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 아키야마를 먼저 족친 다음, 그 정보를 토대로 유력 정치인까지 낙마시키겠다는 큰 시나리오를 세운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권하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이 시나리오는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수준의 시민운동가였죠.



그런데 언론 보도가 너무 과열되다 보니, 검찰의 퇴로도 막혔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걸친 국제적인 로비사건에 유력 정치인까지 엮을 수 있는 초대형 수사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이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죠. 그래서 검찰은 없는 혐의까지 다 쥐어짜서, 결국 아키야마를 전혀 별개의 범죄인 ‘탈세’로 기소하는 것으로 지리멸렬한 결론을 맺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아들도 기소될 수 있다는 협박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개, 남의 나라 얘기라기엔 너무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일본 검찰의 사례로 읽는 한국 검찰



비슷한 시기인 2009년 한국에도 전형적인 극장형 수사가 있었습니다. 한 유력 정치인이 건설업자를 통해 고가의 시계를 전달 받았다는 일종의 뇌물 수수 사건을 대검찰청 중수부가 맡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력 정치인이 부인을 시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진술을 했다는 보도가 새어나온 것입니다. 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며, 검찰 측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킬 목적으로 진술 내용 일부를 의도적으로 외부에 누설한 것입니다.


2009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에 대한 보도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도쿄지검’이 보여주는 행태는 한국의 검찰 관련 보도와 유사한 점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제 식구 감싸기는 기본에, 조사 과정에서 혐의를 계속 부인하면 주변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는 협박을 동원하고, 심지어는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소환조사 직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까지 판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대 권력기관인 검찰이 조직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또 그런 상황에 처한 개인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법조 기자의 눈으로 상세하게 다룬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10년이 지난 책이지만, 아직까지 현실 설명력이 있다는 점에서 입맛이 쓰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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